지독하게도 많은 금요일 부식, 지루한 칼질만이 반복되던 차에 이왕 자르는거면 재밌고 빠르게 자르자며 음료수 내기를 하자는 노왕의 즉석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이번 종목은 햄으로, 밀어썰기나 당겨썰기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던 나는 일기토에 응낙했다.


이전에 양왕 대 노왕의 양파전이 벌어진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둘이 엎치락뒤치락 하며 속도자랑을 하곤 했다. 노왕은 부식 잡기 외에도 카레나 짜장 따위의 캔 5박스 전부 따기, 맛살비닐 벗기기, 오징어 2kg 30초 안에 해체하기 등 기상천외한 취사기네스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노왕은 햄썰기에 자신감을 드러내며 이길것을 자신했지만, 본인 역시 파썰기에서는 부동의 1인자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고, 햄 부문에서도 조리사 이모가 인정한 스피드를 갖고 있었기에 노왕과 나 사이의 긴장감은 자못 팽팽했다.

우선 햄을 들고와 33개씩 균등하게 배정하고, 도마 옆에 가지런히 정렬했다. 후임들의 '시작' 외침에 따라 난도질을 시작하기로 했다. 노왕은 보나마나 미리 껍질부터 전부 벗기고 전부 반으로 쪼갠 뒤 썰기에 돌입할 것이었고, 나는 껍질 벗기기에 나름 달인급의 노하우가 있었으므로 그때그때 벗기면서 썰기로 작정했다. 노왕이나 나나 모두 반으로 쪼갠 두개의 햄을 한꺼번에 썰면서 스피드를 올릴 기세였다. 한편 우리의 이 대결을 목전에 두고 양왕과 후임들은 이 승부에 관심을 보이면서 각각 베팅을 하기도 했다.

노왕은 한때 후임이 입에 넣어주는 수박을 먹으면서 칼질을 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껍질을 미리 까고 시작하는 노왕이 상대적으로 빨라보이는 착시효과에 불과했다. 나는 노왕이 껍질을 까는동안 이미 10개 내외의 햄을 반찬통으로 쓸어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양왕과 이모가 내 스피드에 경탄하면서 노왕도 긴장하기 시작했고, 마침 내 손도 조금씩 무리가 오면서 속도가 느려졌다. 음료수 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대결은 복칼의 자존심을 걸고 취사장 2관왕의 기회를 노리는 나와 노왕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좀 전에 빵먹은 힘까지 쥐어짜내 마지막 햄의 등짝을 찢었고, 결국 나는 승리했다!

노왕은 내가 다 썰고도 최소 7개 이상의 햄을 더 썰어야만 했다. 박수치는 이모와 양왕과 후임들은 속도차의 현저함에 놀라고 나의 실력에 또 한번 경탄했다. 자신만만해진 내 승자의 여유 앞에 괴로워하던 노왕은 빨리 끝내려고 두껍게 썬게 아니냐며 끊임없이 이런저런 의혹을 제기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그 현저한 차이로 콜드게임을 거둔 나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부식잡기 주요종목으로는 파, 양파, 무, 호박, 햄, 감자, 양배추(사각), 양배추(슬라이스), 오이, 풋고추 등이 있는데, 규격면에서 파와 양파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가 이번 승부를 계기로 햄이 추가되었다.


* 2009.07.25 추가

이후 승리를 갈구하는 그의 간절한 제안에 양파썰기가 벌어졌다. 이때 양왕이 합류해 양-노-복 3강구도가 형성되었다. 양왕은 너무 급했던 나머지 자신의 손을 썰기도 했고 노왕도 손가락 살갗이 약간 벗겨졌다. 오직 고무장갑을 착용하고 침착하게 썰었던 내 손만이 온전했을 따름이었다.

또 얼마뒤에는 풋고추 50개 썰기 대결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때에도 내가 우승해서 취사장 칼질 3관왕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공식 칼본좌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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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ote at 2010/06/01 17:37
저번에도 읽었던 것 같은데. 다시 읽으니, 그 긴장감이 전해오는군요.
취사반도 나름 경쟁을 하니 손만 썰지 않는다면 재미있겠네요. ^^
BlogIcon BOK2 
wrote at 2010/07/12 04:14
제 글을 제가 읽다가 댓글이 있었음을 오늘에야 확인했네요ㅠㅠ 저 경쟁이 무료함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 중 큰 부분을 차지했었죠ㅎㅎ
wrote at 2010/07/12 11:10
음... 경쟁은 확실히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본 .... 실시간이 아닌 SBS sports 새벽방송 6시 30분을 보면서, 경쟁이 있어야 박진감 넘치는 구나라고 생각을 했죠.

스페인이 이겼는데... 별로 그닥....
BlogIcon BOK2 
wrote at 2010/07/14 04:18
ㅋㅋ 저때 그나마 저런 경쟁이라도 없었다면 아마.. 그냥 널브러졌겠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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