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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ized under 리포트 공작소 & written by BO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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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부터 남다르게 책을 많이 읽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중학생의 티를 벗고 고등학생이 되어가던 시절, 그 친구가 재미나게 읽던 책이 바로 이 ‘체 게바라 평전’ 이었다. 당시의 내게 그 붉은색의 표지는 꽤나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 친구가 읽던 수많은 책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바로 이 ‘체 게바라 평전’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당시의 나는 그저 특별한 인상을 받은 것에 그쳤다. 그 친구가 말하는 ‘사회주의’나 ‘쿠바혁명’ 이라는 것이 당시의 어린 내게는 더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게 그 책은 내 머릿속에서 차츰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된 이후 나는 우연히도 서양사의 이해 과목의 과제물 도서명에서 똑같은 제목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표지만은 낯설지 않은 이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단지 몇 십년 전만 하더라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상과 이념에 대한 통제가 거의 사라진 요즈음에는 중국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서적에서부터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건이나 영웅들을 다룬 책들이 인기를 끌고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의 그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중략)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다. 첫 전투에서 생존한 12명의 전사들로 시작한 그들은 결국 2년여 만에 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게바라는 쿠바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민중으로 구성된 군대, 거점봉기 전략, 저개발국가의 투쟁공간은 농촌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부군에는 없는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중국혁명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중국의 혁명을 모델로 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힘의 원동력도 결국은 민중이었다. 쿠바혁명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민중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결국 혁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혁명 이후 그는 각국의 지도층과의 만남을 가지고, 쿠바의 정치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그렇게 새로운 쿠바를 위해 노력하던 게바라는 1965년 볼리비아로 투신하면서 카스트로와 작별을 고한다.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싸워야 한다는 성스러운 임무를 안고 새로운 전장을 찾아간다’ 는 요지의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남긴 채로 말이다. 카스트로는 혁명가이자 정치가였지만, 게바라는 영원한 혁명가로만 남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쿠바혁명에 대한 지식이 깊지 않다. 그래서 그들의 미묘한 입장 차이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정확히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카스트로의 현실적인 정치노선에 대해, 이상적인 혁명을 추구하던 게바라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시대의 양극화 된 세계구도 속에서 쿠바가 살아남을 방법으로 택한 카스트로의 정치노선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양극 모두에게 고립당하는 방법으로는 쿠바의 생존 자체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게바라는 그의 또 다른 혁명을 위해 떠났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지키고 늘리는 데만 급급한데 반해, 게바라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민중을 위해 투신하는 영웅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기득권층인 사람들에게 그들의 기득권을 언제든지 버리고 민중 속으로 돌아갈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리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나 콩고와 볼리비아에서 그가 투신한 혁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미국과 소련의 비밀경찰에게 쫓기다가 최후에는 결국 그의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다.
위인전을 읽던 어릴 시절에는 그 위인의 행보와 업적을 지켜보며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곤 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되어 다시 읽는 이 평전이라는 것도 위인전을 읽을 때의 나의 시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부족한 나에게 위인전은 마치 맹목적인 충성을 이끌어내는 책과도 같았다. 대학생이 된 이 시점에서 읽은 체 게바라 평전은 위인전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하다.
이 책은 ‘평전’ 이라기보다는 ‘위인전’ 이 더 알맞다는 생각이 든다. 평전답지 않게 그에 대한 비평은 거의 없는 듯 보인다. 콩고와 볼리비아의 투신이 결국 혁명의 불길을 당겼다 하더라도 그의 무리한 실천에 대해 어느정도의 비판은 가해야 하지 않았을까. 쿠바 혁명은 그들 국가의 특수성에 기인한 혁명이었다. 쿠바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혁명을 억지로 다른 상황에 적용하려 했던 것은 그의 실천의 한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위인전에 나오는 여타 인물들보다 더욱 존경받아 마땅할 인물이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비평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그가 완벽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내가 객관적인 시각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까.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읽은 그의 마지막에 대한 글이 있는데 여기에 소개할까 한다. <볼리비아 장교는 그의 마지막 앞에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게바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혁명의 불멸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그는 스스로의 신념에 모든 것을 걸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신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하였다. 그의 신념은 곧 그의 인생의 목표였다. 그는 자신 하나을 위해서 살아간 사람이 아니라 민중을 위해 살다간 사람이었다. 모든 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위한 혁명은 그에게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샤르트르는 그를 보고 ‘이 시대에 가장 완벽하고 성숙한 인간’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인생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그의 인생으로 비추어 볼 때도, 그는 샤르트르의 평가 그대로 완벽하고 성숙한 인간 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간 그의 인생을, 이념과 사고는 배제한 채, 대중의 입맛에 맞게 적절히 자본주의로 포장하여 재탄생 시킨 현재의 이미지를 그가 본다면 과연 뭐라고 말을 꺼낼 것인가. 그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도, 이념에 의한 맹목적인 비판도 결코 옳다고 할 수 없다. 한 인물을 두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의 입맛에 맞게 부활한 게바라,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이제 그의 사상이나 가치관보다 그의 인생에서 배울 수 있는 실천적인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변화하는 대중에 걸맞게 그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이라는 것도 결국 변화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육체적으로 극심한 천식을 달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병을 억누르고 혁명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혁명을 일으키고, 철저하게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었다. 세상은 이제 이념과 사상을 강요하지 않는다. 지금의 대중에게 이제 게바라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이기는 힘인 것이다. 그의 본질이 그의 인생철학에만 있지는 않다 할지라도, 대중에게 진정으로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혁명이 아니라 그의 인생일 것이다.
스스로를 이기는 방법. 게바라는 우리에게 지금이 바로 내 인생의 목표설정이 필요한 시점임을 일러주고 있다. 게바라의 머리에는 굳은 신념, 손에는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한 총이 들려 있었다. 나는 어떤 신념과 무기를 가지고 지금의 시대를 헤쳐 나갈 것인가? 그것에 대한 확신이 서는 날이 늦지 않기 위해서라도, 폭넓은 공부를 통해 사회진출의 기초 작업을 탄탄하게 진행해 나가야겠다.
단지 몇 십년 전만 하더라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상과 이념에 대한 통제가 거의 사라진 요즈음에는 중국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서적에서부터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건이나 영웅들을 다룬 책들이 인기를 끌고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의 그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중략)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다. 첫 전투에서 생존한 12명의 전사들로 시작한 그들은 결국 2년여 만에 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게바라는 쿠바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민중으로 구성된 군대, 거점봉기 전략, 저개발국가의 투쟁공간은 농촌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부군에는 없는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중국혁명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중국의 혁명을 모델로 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힘의 원동력도 결국은 민중이었다. 쿠바혁명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민중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결국 혁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혁명 이후 그는 각국의 지도층과의 만남을 가지고, 쿠바의 정치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그렇게 새로운 쿠바를 위해 노력하던 게바라는 1965년 볼리비아로 투신하면서 카스트로와 작별을 고한다.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싸워야 한다는 성스러운 임무를 안고 새로운 전장을 찾아간다’ 는 요지의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남긴 채로 말이다. 카스트로는 혁명가이자 정치가였지만, 게바라는 영원한 혁명가로만 남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쿠바혁명에 대한 지식이 깊지 않다. 그래서 그들의 미묘한 입장 차이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정확히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카스트로의 현실적인 정치노선에 대해, 이상적인 혁명을 추구하던 게바라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시대의 양극화 된 세계구도 속에서 쿠바가 살아남을 방법으로 택한 카스트로의 정치노선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양극 모두에게 고립당하는 방법으로는 쿠바의 생존 자체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게바라는 그의 또 다른 혁명을 위해 떠났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지키고 늘리는 데만 급급한데 반해, 게바라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민중을 위해 투신하는 영웅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기득권층인 사람들에게 그들의 기득권을 언제든지 버리고 민중 속으로 돌아갈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리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나 콩고와 볼리비아에서 그가 투신한 혁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미국과 소련의 비밀경찰에게 쫓기다가 최후에는 결국 그의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다.
위인전을 읽던 어릴 시절에는 그 위인의 행보와 업적을 지켜보며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곤 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되어 다시 읽는 이 평전이라는 것도 위인전을 읽을 때의 나의 시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부족한 나에게 위인전은 마치 맹목적인 충성을 이끌어내는 책과도 같았다. 대학생이 된 이 시점에서 읽은 체 게바라 평전은 위인전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하다.
이 책은 ‘평전’ 이라기보다는 ‘위인전’ 이 더 알맞다는 생각이 든다. 평전답지 않게 그에 대한 비평은 거의 없는 듯 보인다. 콩고와 볼리비아의 투신이 결국 혁명의 불길을 당겼다 하더라도 그의 무리한 실천에 대해 어느정도의 비판은 가해야 하지 않았을까. 쿠바 혁명은 그들 국가의 특수성에 기인한 혁명이었다. 쿠바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혁명을 억지로 다른 상황에 적용하려 했던 것은 그의 실천의 한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위인전에 나오는 여타 인물들보다 더욱 존경받아 마땅할 인물이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비평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그가 완벽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내가 객관적인 시각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까.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읽은 그의 마지막에 대한 글이 있는데 여기에 소개할까 한다. <볼리비아 장교는 그의 마지막 앞에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게바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혁명의 불멸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그는 스스로의 신념에 모든 것을 걸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신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하였다. 그의 신념은 곧 그의 인생의 목표였다. 그는 자신 하나을 위해서 살아간 사람이 아니라 민중을 위해 살다간 사람이었다. 모든 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위한 혁명은 그에게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샤르트르는 그를 보고 ‘이 시대에 가장 완벽하고 성숙한 인간’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인생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그의 인생으로 비추어 볼 때도, 그는 샤르트르의 평가 그대로 완벽하고 성숙한 인간 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간 그의 인생을, 이념과 사고는 배제한 채, 대중의 입맛에 맞게 적절히 자본주의로 포장하여 재탄생 시킨 현재의 이미지를 그가 본다면 과연 뭐라고 말을 꺼낼 것인가. 그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도, 이념에 의한 맹목적인 비판도 결코 옳다고 할 수 없다. 한 인물을 두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의 입맛에 맞게 부활한 게바라,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이제 그의 사상이나 가치관보다 그의 인생에서 배울 수 있는 실천적인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변화하는 대중에 걸맞게 그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이라는 것도 결국 변화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육체적으로 극심한 천식을 달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병을 억누르고 혁명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혁명을 일으키고, 철저하게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었다. 세상은 이제 이념과 사상을 강요하지 않는다. 지금의 대중에게 이제 게바라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이기는 힘인 것이다. 그의 본질이 그의 인생철학에만 있지는 않다 할지라도, 대중에게 진정으로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혁명이 아니라 그의 인생일 것이다.
스스로를 이기는 방법. 게바라는 우리에게 지금이 바로 내 인생의 목표설정이 필요한 시점임을 일러주고 있다. 게바라의 머리에는 굳은 신념, 손에는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한 총이 들려 있었다. 나는 어떤 신념과 무기를 가지고 지금의 시대를 헤쳐 나갈 것인가? 그것에 대한 확신이 서는 날이 늦지 않기 위해서라도, 폭넓은 공부를 통해 사회진출의 기초 작업을 탄탄하게 진행해 나가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