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근대민족운동 기말고사 답안 중 1

중립외교나 대동법 실시 등에 대한 내용은 이미 광해군의 재평가라기보다는 정설에 가까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그러한 내용보다는 사료에 초점을 두어 나름의 논지를 펴 보고자 한다.

쫓겨난 뒤에도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측면은, 조선 후기 역사책이나 개인문집에서 찾을 수 있는 '혼군' 이나 '폐주' 라는 명칭 등을 통해 확인된다. 옛날보다 나아질 것이 없다는 따가운 시선을 피하려면 옛 임금에 대한 추억 자체를 없애야만 했을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전멸해버린 북인들의 행적을 서민들의 평가를 통해 보아야만 하는 것, 광해군과 그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일차적으로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광해군일기는 중초본과 정초본이 동시에 남아있는 유일한 실록이다. 비교해보면 후금과의 화친론에 대한 부분에서 스스로 화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영창대군의 죽음을 알고 애도하며 대군의 예로 장사지내라 하자 오히려 신료들이 반대하는가 하면, 임해군의 병사 보고서가 정초본에서는 삭제되어 있으며, 살해일자가 오류가 있음을 알고 이것 또한 삭제되었다. 영창대군과 임해군 살해에 연루된 교동별장 이정표의 무죄를 주장한 사람은 인조반정 공신 이시백이며, 인목대비를 처벌하라고 전국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고 서명한 기록이 남아있음에도 광해군은 오히려 이를 물리쳤다.

광해군은 과연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를 폐하고자 했을까. 정권을 둘러싼 이들의 흉계는 아니었을까. 마음이 여리고 정리에 충실했던 것이 오히려 약점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백주대낮에 흥안군을 궐 내에서 살해한 인조를 보면 무엇이 진정 패륜인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왕권강화에 대한 정치적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이에 편승해 정적들의 씨를 말리려한 대북파의 무리수는 실수였다. 광해군과 대북파는 성리학적 질서 사회 하 법가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어긋나는 점이 많아 사림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결국 광해군 최대의 업적으로 평가받는 중립외교 역시 내치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한 셈이라 할 수 있다.

왕위에 있으면서 아무리 탁월한 치적을 쌓았다 할지라도 왕위를 빼앗긴 1차적 책임은 분명 그 자신에게 있다. 광해군의 몰락은 왕권과 신권의 대결에서 왕권이 패배한 것을 의미하며, 붕당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이끄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귀결이다.

* 참고문헌
한명기, 『광해군』, 역사비평사, 2000.7.1.
광해군에 대한 오해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MQ7vlL9H5fd1nR3USNGqVbWUXR7zmz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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