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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제 발제지
Ⅰ. 서론
불화는 다른 일반 회화와 달리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개성의 표현을 넘어 불교적인 이념에 입각한 주제를 그려야 하는 성스러운 예술이며, 인간을 교화시키기 위한 목적을 바탕으로 불교세계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교 미술은 인도에서 발생한 후 여러 나라에 전파되어 각 민족 고유의 역사와 사상에 맞게 결합하여 새로운 믿음과 문화가 형성되었고, 그것은 전통과 지역 및 민족적 특수성에 적응된 독자적 미술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하는 바탕이 되었다. 한국에 있어서의 불화도 우리 민족 고유의 미의식에서 출발하여 종교적 목적 달성과 민족의 생활양식이 표출된 회화라 하겠다. 특히 고려 불화는 조상과 함께 예배의 대상이었으며 사원을 꾸미고 불교 사상을 대중들에게 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것은 인간 내면세계에 대한 믿음의 산물로서 순박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표출된다.
이와 같이 한 시대를 대표했던 불화는 종교로서의 기능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 측면까지 그 영향력을 넓혔다. 이는 앞으로 논문에서 살펴보겠지만, 불교 미술의 양식과 색채적 특징에 있어 우리 민족의 시대적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새롭게 표현되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예술적 가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1. 고려 불화의 기원, 2. 시대적 배경, 3.고려불화의 특징, 양식, 종류, 4. 고려불화의 색채, 5. 후대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시대적 변화에 따라 종교화인 고려 불화가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미술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Ⅱ. 고려불화의 기원
1. 불화의 기원
불화의 명확한 기원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불화도 불교조각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성립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초기의 불화로서 남아있는 예가 없어 미루어 짐작할 뿐이며, 여러 경전을 통해 초기의 불교사원에 불화들이 그려졌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권제(卷第)23, 율부(律部)에서, 석가시대에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세운 불교 최초의 사원 기원정사(祈園精舍)에 불화를 장식한 기록이 보이는데, 사원의 건물이나 용도에 따라 불화를 각기 다르게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약차(藥叉), 본생담(本生談), 불전도(弗傳圖), 해골(骸骨)등 교훈적이고 장엄적(壯嚴的)인 그림을 그렸다. 물론 석가 생존 시에 위의 내용과 같은 그림이 실제로 그려졌는지는 의문이나, 이 경(經)이 성립된 B.C 2~3세기 경에는 적어도 사원의 수호 및 장식, 일반 대중의 교화를 위한 그림이 그려졌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예배 대상으로서의 존상화(尊像畵)들은 대승경전인 『현우경(賢愚經)』이나 『현겁경(賢劫經)』등 몇몇 경전에 보이고 있다. 이 경(經)들에서는 화사(畵師)들이 부처님의 형상을 그려 예배하고 공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곧 예배 대상으로서의 본격적인 불화가 제작되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진 최초의 불화는 아잔타(ajanta)의 벽화로 알려져 있으나, 이 작품들은 B.C 2 세기 경에 그려진 것이어서 부처 생존 당시인 초기 불교시대의 불화는 알 수 없다. 단지 경전에 나타난 내용을 바탕으로 그 존재여부만을 짐작하게 한다.
2. 고려불화의 기원
불교가 전래된 4세기 이후 삼국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으며, 그에 따른 불교회화도 상당수 제작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우리나라 불화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원효스님 등 10성(聖)의 화상을 불․보살상과 더불어 그렸다고 하나 이 작품역시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다만 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화엄경변상도(華嚴經變相圖)>가 수년전에 발견되었는데, 이 사경화(寫經畵)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불화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불화는 주로 벽화 형식으로 사원의 소멸과 함께 사라져 지금 남아 있는 불화는 거의 없는 형편이나, 고구려 시대의 여러 고분벽화에 불교적인 요소의 그림이 남아 있어 당시의 불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우수한 불화가 상당히 많이 제작되었는데, 고려시대는 왕실불교라고 불릴 만큼 귀족들에 의해 불교가 성행하면서 불화 역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고려불화는 지금 현재 80여점이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호암미술관 3점, 호림미술관 1점, 국립박물관 1점 등 5점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Ⅲ. 고려불화의 시대적 배경
고려 태조가 후고구려를 없애고 새로운 왕조 고려를 세운 해가 918년이고, 후삼국을 통일한 때가 936년이다. 초기의 고려 즉, 제 2대 혜종(惠宗, 944~945)부터 제 3대 정종(定宗, 946~949) 때까지 후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지방 세력가들이 호족연합과의 동조로 막강한 세력을 갖고 고려의 정권을 지탱해 나갔다.
고려가 새로운 모습으로 갖추어지는 시기는 제 4대 광종(光宗, 950~974)때 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노비안검법과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관료 제도를 정비하고 경제적, 군사적 중앙 집권화를 시도했다. 이런 바탕을 근간으로 하여 성종이 고려적인 모습의 사회, 즉 관료적 중앙 집권 중심의 귀족사회를 완성시켰다. 관료적 귀족사회는 이에 알맞은 사회 문화를 창조해 내었으며, 유교에 의한 현실적 정치 제도를 정비하고 정신문화로서는 불교를 채택하였다.
한편, 우리 역사상 불교에 의해서 나라가 세워지고 이런 전통이 끝까지 지켜진 유일한 나라는 고려밖에 없다. 고려는 시종일관 불교가 국교로 행세한 철저한 불교국가였던 셈이다. 그래서 서울 개경에 법왕사(法王寺), 왕륜사(王輪寺)등 10대 사찰을 세우고 후백제군을 격파한 충남 연산에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하는 등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신라의 서울 경주에서 각 종파의 조사들을 초청해서 개경에 그들의 본사를 건립하도록 했다. 더욱이 각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그들 세력 아래에 있는 사원들을 크게 증축하고, 태조에게 조력한 많은 사원들도 대대적으로 수축했던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국초부터 건국의 이념이 되었고 국교로 공인되었기 때문에, 융성을 극하던 신라 불교를 계승하여 관료적 귀족사회에 걸맞는 귀족불교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의 불교는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이 백중세를 이루면서 모든 사람들의 귀의를 받고 있었지만, 귀족사회에 알맞은 교종이 점차 대세를 잡아가고 있었다. 선종이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까지의 호족사회에 알맞은 호족불교였다면 이러한 호족불교는 고려가 안정되면 어차피 시정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것은 호족연합의 세력 기반 위에서 후삼국을 통일했던 고려가, 이제 사회의 안정과 더불어 귀족 중심의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면, 알맞은 형태의 불교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 불교야말로 귀족사회에 알맞은 교종의 귀족불교(貴族佛敎)인 것이다.
교종은 신라 당시 오교(五敎)가 있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보다는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전통이 고려에도 내려와 많은 종파가 난립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교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종파가 화엄종과 법상종이었다. 화엄종은 원효의 법성종 또는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과 의상(義湘)의 화엄종 등이 있으며, 화엄종은 신라 이래 가장 저명한 종파를 이루었다. 화엄종의 교리가 불교의 진수이므로 모든 불교종파는 화엄종을 위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종지(宗旨)였다. 이들 교종의 성행에 힘입어 잡다한 종파를 통합하고자 해서 화엄종의 대각국사(大覺國師)는 천태종을 크게 중흥시켰던 것이다. 천태종은 신라 이래 고려에서는 중국 송나라에 역수출했을 만큼 화엄종에 버금가는 종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고려적인 불교사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미술은 불교미술이며, 그것은 화려한 귀족 취향의 미술일 수밖에 없다. 오랜 귀족사회의 지속은 여러 가지 폐단을 몰고 오기 마련이다. 문신들을 위주로 한 문벌귀족들의 지나친 세력 팽창과 광대한 토지의 겸병으로 인한 경제구조의 파탄 등, 갖가지 모순들이 사회를 극도로 혼란시켰다. 이 가운데 가장 심각한 모순이었던 무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격하는 마침내 무신난(武臣亂)이라는 혁명의 회오리바람을 몰아오게 하였다. 이 무신난은 여러 가지 면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우선 문벌을 중심으로 한 문신귀족들의 질서 체계가 무너지고, 무력에 의한 힘이 사회의 질서를 이루게 되었다. 왕은 이제 명목상의 최고 통치자일 뿐이고, 무신 실권자가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였다. 이들 무신을 중심한 실권자들은 전대 문신들보다 한층 더 막대한 장원을 소유하게 되었고, 따라서 고려의 경제적 질서는 정치적 질서와 병행해서 귀족사회의 사회체제를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에 농민과 노비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는 커다란 요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인시대의 정신적인 뒷받침은 교종불교와는 다른 선종불교가 담당하게 된다. 무인들의 직선적인 성격에는 난해한 교리보다는 직설적인 선리(禪理)가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다는 이유도 강했으며, 더구나 문신귀족들의 교종은 무신들을 적대시하여 언제나 호시탐탐 무신타도의 기회를 포착하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무신들은 자연히 귀족불교시대에 푸대접받던 선종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불교를 성격 짓는 것은 바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조계종(曹溪宗)이다. 보조는 선교통합을 주장하면서 그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치게 되는데, 이것은 전대의 천태종과 또 다른 면에서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대는 따라서 전대와는 다른 미술양식이 성립되고 있었으며, 그것은 선종의 불교사원이 주도하는 불교미술과 여기에 영향을 받은 무인시대 문인들의 미술이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인시대는 강대한 원(元)의 장기간에 걸쳐 자행된 지루한 침략으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무너지고 만다. 이후 약 일세기간에 걸쳐 원의 집요한 강압정책과 원(元)세력과 결탁한 권문세가들의 사회적․경제적 진출로 인한 새로운 사회질서가 확립되었고, 원이 물러간 후 구세력의 타도에 힘입어 새로운 사대부 계층의 등장 등으로 새로운 사회체제가 이루어진다. 이 사대부 계층은 결국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조를 세우는 세력이 된 신흥세력이다.
이처럼 고려 말기인 14세기 후반기로 접어들면 신진 사대부들의 진출이 급격히 늘어나고, 이에 따라 신유학인 성리학이 불교를 대신해서 당대의 세력을 휘어잡게 된다. 이 당시는 권문세가들이 방대한 장원과 수많은 노비들을 거느리며 당당한 세력가로 행사하면서 일종의 영주 구실을 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발맞추어 사원들도 권문세가들 못지않게 거대한 사회적 경제적 세력으로 부각된다. 따라서 당대의 불교는 권문세가들에 알맞은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호사를 극한 불교였던 것이다. 이러한 권문세족들과 불교세력에 반대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신흥 성리학파이던 사대부 계층이었다. 즉 호사를 극하던 미술의 등장인 것이며, 여기에 반기를 든 사대부들의 미술이 대두한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불화의 발전이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불화는 이들 왕실을 중심한 권문세족들의 시주에 의한 것들이며, 이 그림들은 당대의 사회적 성격을 그대로 반영이나 하듯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고려불화에는 예리한 관찰과 직관으로 전신의 흐름을 압축해내는 강인한 내면 지향의 세계가 내포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정신 세계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선불교(禪佛敎)정신의 영향이 매우 크다. 또한 고려사에서 발견되는 신앙 의례에 의하면 고려의 불교 신앙은 밀교 사상과 정토 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려 시대의 불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시대의 밀교는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한 화엄 밀교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불화 주제의 다양성과 고도로 발달한 상장적 체계를 이룩함으로써 신비감의 극치를 이루었다.
주제에 있어서도 정토신앙(淨土信仰)이 바탕이 되는데, 정토교란 넓은 의미로 말하면 불국토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대승 불교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좁은 의미로 말하면 아미타의 극락 정토교를 말한다. 이 같은 정토교는 급기야 극락의 모습을 구상화하여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의 모습을 갖춘 불화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한편 정토교의 교설은 극락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조화성을 강조한다. 이런 정토교의 영향으로 고려불화는 정교하고 세밀한 묘사로 고유한 특징을 갖게 된다. 그리고 현존하는 고려 불화에서 정토교를 주제로 한 불화와 관음(觀音) 종류의 불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고려 불화에 미친 정토교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밀교와 정토사상, 그리고 선 사상을 고려 불화의 표현 기법에 있어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역사적으로는 잦은 전쟁과 내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불교라는 종교적 상징을 통해 귀의(歸依)하게 만들었다.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현실에 대한 극복과 저항적 이미지의 표출보다는 현실도피를 택하면서 아름다움에 몰입하고 탐닉하는 경향으로 화사하고 섬세함의 극치를 보인다. 즉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인 현실을 잊고 극락정토를 꿈꾸며 아름다움인 탐미주의로서의 표현을 나타내는 것이 고려 미술의 특징이라 하겠다.
Ⅳ. 고려 불화의 양식
1. 특징
고려(918~1392)는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였던 만큼 최고의 기량을 지닌 작가가 불화 제작에 참가했기 때문에 고려 불교의 심오한 사상이 불화에 잘 나타나 있다. 현재 고려불화는 140여 점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일본에 있고 우리나라에는 일부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불화를 통해 보면 <아미타불화(阿彌陀佛畵)>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지장보살도(地裝菩薩圖)>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대개 고려 후기인 14세기에 제작된 불화들로 한 시기에 한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화들은 현세의 안녕이 내세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미타 신앙에 의탁한, 권문세가의 현실적 종교관을 엿보게 한다. 좀 더 자세히 고려불화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른 시대의 불화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발견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로, 아름다운 구도이다. 인물이 많은 군도(群圖)일 때 고려불화는 매우 독특한 화면구성을 하고 있다. 아래 위의 상하 2단을 구별하여 위는 본존불, 아래는 협시보살을 배치하는 2단 구도를 표현하고 있다. 본존 무릎 위로 본존 의외(以外)의 협시가 전혀 없는 화면 구성은 본존의 권위를 극대화시킬 뿐만 아니라 본존에게 시선을 집중시켜 주는 효과를 주고 있다. 여기에 머리 주위로 둥근 금선(金線)의 두광(頭光)과 신체를 둥글게 감싼 신광(身光)은 금빛 찬란해서 불상을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구도의 아름다움이 적용된 예로는 <아미타구존도(阿彌陀九尊圖)>,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경변상도(輕邊相圖)인 <미륵하생변상도(彌勒下生變相圖)>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려불화에서 발견된다. 2단구도 외에도 삼각구도나 두손 모아 들어올리는 구도, 그리고 <내영도(來迎圖)>나 <나한도(羅漢圖)> 또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처럼 대각선이나 측면관으로 자유분방하게 화면을 구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두 번째로, 불․보상들의 형태이다. 얼굴이 단아하고 신체가 단정한 모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얼굴이 둥글면서 단정하고 우아할 뿐만 아니라 체구 또한 반듯하고 아담하며 단정한 형태여서 한마디로 단아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불화의 불․보상의 형태가 모두 단아한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 1320년 전후해서 단아한 형태미가 최고조에 이르는 것 같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정가당 소장 지장시왕도 협시 가운데 제석(帝釋)․범천(梵天)같은 화면은 유난히 풍만한 모습의 형태미를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건장하고 풍만한 형태는 13세기 불화에서 주로 나타난다.
세 번째로, 고려불화의 화면을 가장 눈에 띄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색깔이다. 색깔은 불화의 생명을 좌우하는데 고려불화의 색깔은 맑고 밝으면서도 튀지 않는 은은한 중간색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슴에 와 닿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이런 아름다움은 특히 붉은 색 가사(袈裟) 빛깔 때문으로 생각된다. 1286년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오른쪽 어깨를 덜어내는 듯한 우견편단식의 통견착의(通肩着衣)로 대의(大衣)를 입고 있는데, 밝고 선명한 금선 주름과 금선으로 된 큼직한 꽃무늬가 배치되어 호화찬란한 색깔을 연출하고 있으면서도 은은함과 고귀함을 잃지 않는다. 붉은 가사 밑으로 주름진 하의는 녹색 바탕에 금무늬가 그려져 있어 적녹(赤綠)의 대비효과가 절묘하다. 이런 적녹의 기본색은 거의 대부분의 고려불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고려불화의 색이다. 이러한 대비효과는 바탕색에 의하여 한층 선명히 드러난다. 고려불화의 바탕색은 대개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는 갈색이기 때문에 밝고 화려한 붉은 색조가 한결 선명히 부각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려불화를 특징짓는 것은 화려한 금선으로 순금색을 옷주름의 유려한 선묘나 가사의 화려한 꽃무늬에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광배(光背) 테두리, 대좌(臺座)의 무늬, 심지어 보관(寶冠)의 장식무늬에까지 어디에나 쓰여지고 있다. 이러한 금선(金線)의 사용은 중국이나 일본 불화에서 발견할 수 없는 고려불화만의 주요한 특징이다. 고려불화의 황금 빛깔은 호화롭고 고귀하게 화면을 구성해 고상한 왕실 귀족적인 분위기, 더 나아가 극락(極樂)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네 번째로, 제작기법을 들 수 있다. 고려불화의 특징적인 제작기법으로 복채법(伏彩法)을 들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화면 뒤에서 칠을 하여 안료가 앞으로 배어 나오도록 하는 기법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신체나 옷 등에 주로 사용하는 기법으로, 뒤에서 백색 안료를 칠한 뒤 앞면에서 다시 붉은색이나 황토색 계열 안료를 엷게 칠하여 부드러운 살색을 연출하거나, 붉은색을 화면 뒤에서만 칠해 은은한 파스텔톤의 색감을 연출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화풍의 양식적인 경향을 들 수 있다. 고려불화에는 자연주의적, 그리고 형식주의적인 화풍의 경향이 나타난다. 자연주의적 화풍의 경향은 1300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경향으로 밝고 산뜻한 색채, 유려한 묘선, 동적인 상용(像容) 그리고 온화한 화취(畵趣)를 지니고 있다. 형식주의적 화풍의 경향은 14세기 전반 이후의 작품에서 보이는 경향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지고 상용에 움직임이 적어지며, 평면적이고 경직화한 화취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화풍의 변화에 걸맞게 문양, 이마선, 입술 등 화면을 구성하는 여러 모티프의 형상도 변화한다. 이러한 형상적 변화는 고려시대 후기불화의 연대관(年代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여섯 번째로, 고려불화 특유의 제작배경에 관한 것이다. 아미타 신앙을 대상으로 하는 고려시대 후기불화의 밑바탕에는 아미타신앙을 기본으로 하여 밀교사상이나 법화경 신앙과의 융합이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14세기 중기 이후의 아미타여래계 불화에는 말법사상(末法思想)도 더해져서 그때까지 제작된 적이 없었던 아미타팔대보살도, 관음․지장보살병립도 등 다양한 도상이 만들어졌다.
2. 제작 순서
불화를 그리는 기법은 재료의 바탕에 따라 다르다. 고려의 불화는 벽화보다 탱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종이나 베에 그리는 그림을 위주로 제작 순서를 설명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불화를 그리는 작업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계는 그림 바탕을 다듬는 준비 단계로써 베나 종이를 판판하게 마름하고 여기에 정분(흰색)과 아교나 부레를 덧칠한다. 이렇게 한 그림 바탕을 초지(草紙)라고 하며, 이 단계만을 전문적으로 전담하는 화승(畵僧)을 가칠장, 또는 개칠장이라 한다.
둘째 단계는 가칠이 끝난 바탕에 먼저 초칠, 즉 초상을 한다. 초상은 밑바탕 그림으로 곧 묵선(墨線)으로 된 모본 그림인데 모본은 주로 우두머리 화승이 직접 그려 화본(옛 그림본)을 자기 나름대로 변화를 시킨다. 그런데 벽화나 나무(단청)에는 먼저 화본지(그림종이)에 묵선으로 그려, 여기에 바늘이나 송곳으로 촘촘히 구멍을 뚫어 이것을 가칠한 초지(바탕)에 대고 분을 뿌리면 윤곽선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초칠이라 하며, 이 윤곽선에 따라 선을 긋는다. 이 초상이 끝나면 채색을 입히게 되는데, 채색하는 사람도 채색에 따라 각각 다르다.
셋째 단계는 마무리하는 단계로서 그림이 완성되면 종이나 베일 경우, 족자나 병풍을 하여 오동기름이나 들기름 등을 바르게 된다. 이것은 방수나 방습, 또는 방충에도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단계는 우두머리 화승의 지휘에 따라 분업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절차와 까다로운 법도가 함께 따랐다.
3. 제작 기법상의 특징
(1) 채색(彩色)
고려불화는 제작된 지 600년 또는 7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것들이어서 원래의 상태에 비하여 부분에 따라서는 적지 않게 변화되었으므로 표현의 현상만으로는 사용된 안료의 종류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 대부분이 그저 붉은색, 푸른색, 또는 노란색이라는 추상적인 용어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그러나 실사(實査)를 통해 살펴보면 고려불화에 사용된 안료는 주로 주(朱), 녹청(綠靑), 그리고 군청(群靑)이다. 이 삼색은 고려불화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거의 모든 여래상 가사(袈裟)의 바탕은 주(朱)로 전면을 칠하고 있고, 대의(大衣)에는 녹청(綠靑), 치마에는 군청(群靑)을 사용하고 있다. 이 세부분이 실제 전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 사용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고려불화는 주(朱), 녹청(綠靑), 군청(群靑)의 삼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채색을 매우 절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단조로운 채색임에도 불구하고 고려불화가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안료의 사용법이다. 즉 가장 많이 사용된 주, 녹청, 군청을 비롯하여 황토계(黃土界) 등 눈에 보이는 색은 모두 원색으로 고려불화의 색채는 이처럼 원색을 그대로 사용하였을 뿐, 안료를 혼합하여 쓰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안료를 혼합할수록 채도가 떨어져 탁해 보인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성질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중간 색조를 띠고 있는 것은 변색에 의한 효과도 생각해 볼 수 있겠고 혼합의 가능성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바탕칠을 한 위에 다른 색감의 안료를 덧칠함으로써, 즉 이중의 채색으로 인하여 나타난 효과일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난 그림이 지금까지도 선명한 아름다운 색감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세심한 안료의 운용 방법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금니(金泥)의 적절한 사용이다. 고려불화의 금색은 모두 순금을 사용하고 있는데, 육신부(肉身部)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윤곽선, 옷 주름선, 그리고 각 부분의 표면을 장식하는 각종 각양의 문양들이 금니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곳곳에 사용된 금니선은 바탕 면적의 크기와 색의 상태에 따라 때로는 가늘고, 또는 굵어 채색의 표현의도를 저해한다든지 번잡스럽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당시의 제작자들에 있어 금니는 단순한 채색이 아니라 혼신을 다했던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한 필연적인 도구로 생각되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한 가지 부언할 것은 금박을 가늘게 잘라 붙이는 소위, 절금(切金)이라 불리는 기법은 현존 고려불화에서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기법은 주로 일본불화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그림의 국적을 밝혀내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2) 묘선(猫線)
우선 육신부의 묘선은 대부분의 경우 얇은 먹선으로 윤곽을 잡고 그 선을 따라 다시 얇은 주선(主線)을 그어 나타냈으며 그 이중선 위에 주로 엷게 바림하여 입체감을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먹의 윤곽선이 없고 약간 굵은 주선만을 사용한 경우도 보이나, 이런 경우는 대부분의 화풍상 형식화의 경향이 보이는 작품들로서 14세기 중반 이후의 그림들에서 많이 보인다.
법의의 윤곽과 옷 주름은 기본적으로 얇은 먹선으로 묘사하든지 그 선을 따라 다시 굵은 먹선으로 강조한다든지 하였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 선을 따라 금니선으로 강조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일종의 하이라이트 효과를 얻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기본적인 방침으로 그 묘선들은, 베일은 투명한 듯이 묘사해야 한다는 표현의지에 어울리게 매우 섬세하고 유연하다. (한편 고려불화는 먹선과 주선, 금니선만이 아니라 예는 적지만 황토계, 녹청계 등의 색선을 사용한 경우와 나완도처럼 농담과 굵기를 달리한 먹선만으로 형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경우가 있음도 지적하여 두고자 한다.)
(3) 육신부(肉身部)
세 번째는 육신부의 표현기법에 관한 것으로, 이 부분에는 화면 뒤에서 칠을 하여 안료가 앞면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복채법(伏彩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복채법은 기법상 그림 뒷면의 배접지를 제거하여야만 관찰이 가능하므로 그런 기회란 전면적인 수리를 할 때가 아니면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표면의 면밀한 실사를 통하여 확인 가능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려불화의 육신부 복채는 주로 백토로 짐작되는 백색안료를 사용하였으며, 앞면에서 다시 주(朱)나 황토계 안료를 엷게 칠하여 부드러운 살색을 연출하고 있다. 고려불화의 복채는 육신부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복채의 방법은 육신부 전면 또는 가사 전면을 같은 색으로 칠하는 경우와 좀 더 세분하여 바탕과 장식을 그에 어울리는 색으로 각각 달리 칠하는 경우,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복채를 한 후 앞면에서 의도적으로 색을 칠하는 경우와 색을 칠하지 않고 효과를 그대로 살리는 경우도 있다.
복채의 목적은 물론 추측에 지나지 않겠지만, 물리적인 면에서 보면 색을 뒷면에 칠하였기 때문에 안료가 떨어져 나갈 염려가 없고, 앞면에서도 두껍지 않고 얇은 채색만으로 의도한 색채감을 얻을 수 있어 역시 화면 손상으로 인한 원래 모습의 상실 가능성이 훨씬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표현의 면에서 보면 고려불화의 경우는 앞서 언급했듯이 원색을 사용했을 뿐 안료를 혼합하여 중간 색조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복채를 하고 그 위에 다시 채색을 함으로 자연스럽게 부드럽고 깊이 있는 배색의 효과를 얻으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4) 문양(文樣)
고려불화에 사용된 문양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각종의 문양의 표현되는 장소에 따라 종류를 달리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의 통일성이 엿보이는데, 이는 문양사용에 있어 기본적인 규칙이 있었는지, 아니면 묵수적인 전통의 계승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예를 들어 여래상의 문양으로는 가사에는 연화당초원문(蓮華唐草圓文)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대의(大衣)에는 거의 모든 그림에 공통적으로 구름과 봉황의 운봉문(雲鳳文)이 표현되며, 치마에는 타원형의 연화문과 연화당초문 그리고 예는 적지만 구름무늬도 사용하였다.
이처럼 여래상에 사용된 문양은 종류가 단순한 반면, 관음보살상에 사용된 문양은 좀 더 다양하다. 즉 치마의 바탕무늬는 대부분 귀갑문이며 그 위에 상하대칭의 타원형 연화문을 그려 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고, 귀갑문을 대신하여 칠보문을 사용한 예도 보인다. 그리고 치마의 가장자리는 공통적으로 모단당초문(牡丹唐草文)으로 장식하고 있다. 베일의 문양은 바탕에 마엽문(麻葉文)을 전면에 그리고 그 위에 연화당초원문, 연화원문, 그리고 화원문, 예는 적지만 운봉문을 적절한 크기로 배치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들 문양들은 모두 금니(金泥)로 그려졌으나 한진미술관(恨津美術館)소장의 <아미타삼존도Ⅱ>처럼 군청을 사용한 경우와 극히 일부분이지만 정법사(正法寺)소장의 <아미타여래도>와 같이 은(銀)을 사용했다고 보여지는 예가 전해지고 있다. 문양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부동원(不動院)소장의 <비로자나불도>처럼 신체는 물론 화면 전체를 부처와 보살의 모습으로 가득 채운 그림도 있다. 그리고 원문(圓文)인 경우 원의 테두리를 두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나 금니 또는 백색의 선으로 윤곽을 잡은 예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편 고려불화에 사용된 문양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형상이 다양하여 주목되는 것은 연화당초원문(蓮華唐草圓文)이다. 이 문양은 고려시대 13 ․ 14세기 불화의 대표적 문양으로, 그 형상의 변화 추이만으로도 고려불화의 편년이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능할 정도로 일관되게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양은 중국은 물론 일본의 어느 시대 어느 종류의 불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는 고려불화만의 독자적인 문양으로 현재로서는 이 문양이 사용된 불화라면 고려시대 13․14세기에 속하는 그림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어 국적 판별의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한편 일본 등에 전하는 불화 가운데 도상이 고려불화의 범주에 속하고 화풍과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연화당초원문을 사용한 예가 있는데 이것들은 후대에 일본에서 제작된 모사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화당초원문은 고려 화가들이 고안해낸 독창적인 문양이며, 고려불화 특유의 아름다운 불세계(佛世界) 창출해내기 위하여 그들이 얼마나 노력했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좋은 단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문양은 그림의 제작시기의 추정과 국적을 밝혀주는 요소라는 점에서도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묘법을 염두에 두고 고려불화의 제작기법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불화는 주, 녹청, 군청, 그리고 금니로 대표되는 채색법, 전면을 가득 메우는 각종 각양의 문양, 그리고 장신구 등 화면구성 요소 하나하나를 보면 자기주장이 강하여 전혀 서로 조화를 이룰 것 같지 않게 보이며, 오히려 불가능할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실제는 신비롭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전체적인 조화가 뛰어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할 수 밖에 없게 하는 지고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화면구성 요소들이 지닌 특질을 정확히 파악하여 효과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즉 고려불화의 바탕색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단지 주, 녹청, 군청의 삼색이 주류를 이루고 잇을 만큼 종류가 적다. 그리고 바탕색들은 각 부분에 있어 농담의 차이는 물론 명도의 변화도 시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한 작품 속에서 다른 부분일지라도 일관되게 같은 느낌의 색을 사용하고 있다. 주를 예로 들어보면 단독상은 물론 군상인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는 같은 상태로 채색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불화는 채색에 있어 색감의 미묘한 변화를 거의 시도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색채의 단순성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얇은 묘선은 중복하여 그음으로 하여 층을 만들어 가며 면을 작게 구분하였고, 그 위에 다시 문양을 그려 넣음으로 해서 화면에서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하였다.
4. 고려불화의 종류
(1) 불화의 소재에 따른 구분
1)벽화(壁畵)
벽화는 사원의 내외 벽면에 그려지는 그림으로써 사원을 장엄하기 위한 그림이다. 우리나라는 토벽이 있는 목조건축(木造建築)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토벽화(土壁畵)가 주류를 이루지만 이 외에도 석벽화(石壁畵), 판벽화(板璧畵)가 있다. 또한 목조건축의 외벽(外壁)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목재 벽에도 불화(佛畵)를 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판벽화 혹은 판벽불화(板璧佛畵)라 부른다. 판벽화의 경우 대개 수명이 짧아 오래된 작품은 보기 힘들고 보광사(普光寺) 판벽화, 흥국사(興國寺)판벽화 등으로 명맥을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석벽화는 석굴사원의 석벽에 그려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선 기록으로 존재를 확인 할 수 있을 뿐 실존 유물이 없다. 하지만 인도의 아잔타석굴과 돈황의 운강석굴(雲崗石窟)등에서 오래된 석벽화가 전해지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발전한 불교는 불교의 도입과 함께 불교미술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벽화의 경우 남아있는 것은 없으나 연꽃, 비천(飛天)과 같은 불교적 문양과 소재에서 벽화의 확인을 가능하게 해준다. 기록상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솔거(率居)가 그렸다고 하는 황룡사 노송도(黃龍寺 老松圖)가 있으며 고려시대의 벽화로는 중국 상국사(相國寺)벽화를 옮겨 그렸다고 하는 흥왕사(興旺寺)벽화, 선원사 비로전 벽화 등 다양한 기록이 전해지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부석사 조사당(浮石寺 祖師堂)벽화가 유일하다. 벽화의 경우 이동이 불가능하고 손상을 입으면 새로 그리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탱화의 유행,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을 통한 사원의 훼손 등은 물론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에 따른 사원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벽화의 조성(造成)이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초기의 벽화도 소수만이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2) 탱화(幀畵)
탱화는 고려말 원나라의 지배를 받은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티베트의 ‘탕카(Thang-ka)’가 그 어원이다. 천, 종이 혹은 비단에 그림을 그려 족자 형태로 만들어 거는 불화로 제작의 용이함, 이동이 가능하다는 편리성으로 인해 벽화의 벽면을 대체해 감에 따라 현재 남아있는 고려시대 불화의 대부분이 탱화이다.
탱화는 크게 3가지 유형으로 상단탱화(上壇幀畵), 중단탱화(中壇幀畵), 하단탱화(下壇幀畵)로 구분할 수 있다. 상단은 불보살탱화(佛菩薩幀畵), 중단은 불법수호신의 신중탱화(神衆幀畵)탱화, 하단은 영가천도의 영가단탱화(靈駕壇幀畵)이다. 상단탱화의 불화들은 대체로 불상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금당(金堂)의 정면, 전각의 중앙에 봉안한 불상이나 보살상의 뒷면에 모셔진다. 그리고 중단탱화는 전각의 주불을 모신 불단의 오른쪽과 왼쪽 벽면에 모시는 탱화를 지칭한다. 신중탱화(神衆幀畵)라고도 하며 제석천(帝釋天), 산신(山神)등을 그린 탱화가 이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하단탱화의 하단은 영가단(靈駕壇)이라고도 하며 조상숭배와 연결되어 있는데 조상이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정토신앙(淨土信仰)과 결부된다. 극락왕생을 그린 탱화는 후불탱화(後佛幀畵)로 모셔져야할 것 같지만 대개 하단에 위치한다. 하단탱화는 대체로 불전(佛殿)의 좌우측 벽면에 설치되며 영가(靈駕)의 위패(位牌)나 사진을 봉안한다. 그리고 그 후면에 탱화 거는데 이를 보통 감로탱화(甘露幀畵)라 한다.
3) 사경화(寫經畵)
대부분의 사경(寫經)에는 앞부분에 경전의 내용을 압축해서 묘사한 변상도(變相圖)가 위치하는데 이를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라고 한다. 사경화의 기원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담은 불전도(佛傳圖), 전생(前生)을 묘사한 본생도(本生圖)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대 인도의 여러 불탑(佛塔)과 탑문(塔門) 등에 새겨진 부조상(浮彫像)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사경변상도는 금니와 은니로 정교하게 그렸으므로 회화사(繪畵史)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조성발원기(造成發願記)가 있어 불화양식에 대한 이해와 조성연도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사경화는 본래 불교의 진리를 퍼뜨리기 위해 경전을 필사(筆寫)하는 것이었으나, 인쇄술이 발달한 이후 실용적인 면보다는 경전을 필사함으로써 공덕을 세운다는 신앙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최고급종이인 감지(紺紙)와 같은 색지(色紙)에 금니, 은니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화려한 장식경(裝飾經)으로 발전하게 된다. 현존하는 사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화엄경(華嚴經)』이 있으며 거기에 백지로 된 화엄경 변상도가 나왔다. 사경이 가장 발달한 시대는 고려시대이다. 고려시대는 국가적으로 사경원(寫經院)을 둘 정도로 사경의 제작이 성행하였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인쇄된 판경(板經)으로 대치됨에 따라 판경화(板經畵)가 제작되었다.
4) 괘불(掛佛)
한국 불교회화 중 야외 법회 시 사용하는 대형불화를 통칭하여 괘불(掛佛)이라 한다. 괘불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오직 우리나라와 티베트에서만 유행하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괘불은 전부 조선후기의 것으로 약 100여점이 있으며 이전시기의 괘불은 존재하지 않는다. 괘불 역시 탱화와 마찬가지로 여말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실제로 봉안(奉安)을 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으며, 선초에 들어서야 화룡(畵龍)으로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다는 기록을 통해 괘불과 비슷한 야외법회의 예배대상의 존재와 함께 괘불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괘불의 형식은 독존(獨尊)형식, 삼존(三尊)형식, 군도(群圖)형식으로 나뉘나, 공통적으로 석가모니의 설법 장면을 나타내는 영산회상(靈山會相)을 표현하며, 주불(主佛)을 크게 나타내고 그 외의 등장인물은 작게 해서 화면을 채우는 등의 괘불 특유의 형식을 보인다.
(2) 불화의 양식에 따른 구분
1) 궁정양식
왕공 귀족의 발원과 시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탄력적이고 강인한 묘선이 특징이다. 풍부한 색채와 뛰어난 농담 구사를 통한 입체감, 질감표현이 돋보이는 것으로 문양 묘사에서도 뛰어난 면을 보인다. 동경미술관(東京美術館)의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등은 궁정과 관계 깊은 인물이 발원하여 궁정 소속의 화가들이 제작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으로서 명문(名文)을 화면 좌우측에 기입하였으며 금니에서 보이는 근엄한 서체(書體)가 공통점이다. 이들 작품은 묘선(描線)의 탄력과 강인함, 색채의 풍요함과 높은 명도, 색감에 있어서 뛰어난 농담 구사에 의한 입체감 및 부드러운 질감표현, 그리고 세밀하며 치밀한 문양묘사 등을 통해 고려불화의 특징 중 하나인 궁정양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들 궁정양식은 도화원(圖畵院)이나 화국(畵局)의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짐작 된다.
2) 사원양식
섬약한 묘선, 형식화된 문양과 생경한 색채 표현 등의 특징이 있다. 명문이 있어 사찰과 시주자의 신원은 물론 조성 목적을 확인할 수 있다. 나라 송미사(奈良 松尾侍)의 <아미타팔대보살도>의 금니명에서 볼 수 있듯 승려 등 사원관계자들이 작품제작에 관여한 작례를 보면 묘선은 약간 섬약하게 몰려있는 느낌의 것으로서, 색채표현 또한 생경하며, 공예성 강한 정교함을 지닌 문양 등이 형식화되어 있다. 그렇지만 법은사본(法恩侍本)에 보이는 경묘한 필치 및 중간색을 다용한 화려한 채색법 등 궁정양식과 공통되는 점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풍은 궁정양식에 준거하면서도 결국 그 목표점까지 도달하지 못했던 표현법인데, 이것을 고려불화에 나타난 사원양식이라 부를 수 있다.
3) 민중양식
민중양식은 삼각형의 얼굴과 세밀한 묘사, 화려하고 선명한 채색 등의 특징을 보이며 궁정양식, 사원양식과는 다른 면을 보인다. 일종의 민불화(民佛畵) 형태로 파악되는데, 궁정양식과 사원양식을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 산형 상삼신사(山形 上衫神社)의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에서는 화면 중앙부 아래쪽에 기명란 등을 따로 두지 않고 화면에 직접 묵서했으며, 일반 화공으로 하여금 제작하게 하였던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법은 지금까지 보아온 양식과 다르며 채색과 표현역시 다르므로 이것은 민간 화공에 의해 형성된 작품으로 고려될 수 있으며 고려불화 중의 민중양식을 전하는 작품이다.
(3) 불화의 형식에 따른 구분
고려불화의 보살과 부처들은 고려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여래상의 경우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힘이 느껴지는 사각형의 얼굴과 근엄한 형태,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 가슴의 만(卍)자문 5,6등신의 비례에서 보이는 풍만한 신체구성 등의 특징을 보여준다. 보살 또한 가는 눈썹과 입술, 자비스러운 미소와 같이 풍만한 육체로 그려져 고려 특유의 화풍을 느낄 수 있다.
1) 아미타불화(阿彌陀佛畵)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다스리는 아미타불과 관련한 그림이다. 서방정토는 극락(極樂)이라고도 하며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은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대중적 부처 중 하나이다. 아미타불에 언급한 경전은 『아미타경(阿彌陀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등이 있으며 이를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 한다.
아미타불화는 <관경변상도>, 극락에서 아미타불이 설법하는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 왕생자의 집을 찾아간다는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로 구분된다. 악행을 하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지옥도와 대비되어 선인선과가 강조된 그림이다.
①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줄여서 관경(觀經)이라 하는데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관경변상도라 한다. 관경도 혹은 극락도(極樂圖)로도 불리며, 관무량수경이 아미타극락에 환생하는 방법을 언급한 경전이기에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불화이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가운데 가장 늦게 성립된 것으로 인도 마가다국에서 있었던 왕위찬탈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왕비에게 석가불이 아미타극락을 볼 수 있도록 설교하는 장면을 그린 <관경서분변상도(觀經序分變相圖)>와 왕비가 명상과 염불을 통해 극락을 본 뒤 왕생한 것을 도상화한 <관경16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가 있다. 여말선초에 유행했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변형, 축소되면서 쇠퇴하게 된다.
②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
서방정토에서 무량한 설법을 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그린 것이다. 아미타불이 홀로 그려진 <아미타독존도>, 아미타불과 관음보살(觀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혹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 그려지는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관음·대세지·문수(文殊)·보현보살(普賢菩薩)이 함께 그려지는 <아미타오존도(阿彌陀五尊圖)>와 오존도에 미륵(彌勒)·지장·제장애(除障碍)·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추가되는 구존도(九尊圖)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아미타구존도는 상하구분이 뚜렷한 2단 구조를 보여주는데 상단에 아미타불을 그리고 하단에 보살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지물(指物)을 들고 있다.
③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
아미타불은 왕생자(往生者)가 선행을 쌓고 염불을 행하면 임종 시 구름을 타고 왕생자의 집까지 몸소 마중을 나와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인도한다고 한다. <아미타래영도>는 아미타불과 그 일행이 구름을 타고 왕생자의 집으로 와 서방정토로 데려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염불만 외워도 극락왕생할 수 있지만 9가지의 등급으로 나뉘며 등급에 따라 보살(菩薩), 승려(僧), 속인(俗人) 등으로 묘사된다. 또한 왕생자를 맞을 때도 등급에 따라 달라진다. 아미타설법도와 마찬가지로 독존도, 삼존도등이 있다.
2) 미륵하생경변상도·비로자나삼존도·약사여래불화
고려시대는 아미타불화가 주로 그려졌고 그로 인해 현재 남아있는 불화의 상당수가 아미타불관련 그림이다. 하지만 아미타불외에도 소수의 그림이 전해지는 부처들이 있는데 바로 미륵불(彌勒佛),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약사불(藥師佛)이다. 석가모니불에게 미래에 성불하라는 수기를 받고 56억 7천만 년 후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를 미륵불이라 하며 이것을 그림으로 구현한 것이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이다. <비로자나삼존도(毘盧舍那三尊圖)>는 법신(法神)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문수·보현보살이 협시하는 것으로 현재 쾰른 동아시아 박물관에 남아있다. 약사불은 동방 유리광세계(東方 瑠璃光世界)의 교주로 중생의 병을 치유하고 재난을 없애주는 부처이다. 도상적 특징으로 왼손바닥에 약그릇을 올려놓는 것이 있으며 <약사여래독존도(藥師如來獨尊圖)>와 일광(日光)·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하는 삼존도, 12신장(神將)과 기타 성중(聖衆)을 표현한 <약사불회도(藥師佛會圖)>가 있다.
3) 보살도
①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수월관음도>는 글자 그대로 달이 비친 바다 가운데 금강보석에 앉아있는 관음보살을 그린 것이다. 수월관음은 재난과 질병을 막아주는 관음보살 가운데 하나이다. 보타락가산(補陀落伽山)에 거주하면서 중생을 거주한다고 하며 공상적인 분위기로 묘사된다. <수월관음도>는 보타락가산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의 방문을 받은 관음보살이 설법하는 장면을 형상화 했다. 버드나무가지를 꽂은 정병과 대나무 등의 묘사는 중국을 거치면서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② 지장보살도(地裝菩薩圖)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여 극락으로 인도하는 보살로 지옥계 불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장보살은 브라만교의 지신(地神)에서 유래하였는데 명부의 구세주로 숭앙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 이르러 아미타신앙과 함께 사후신앙(死後信仰)으로서 널리 퍼지게 된다. 일반적인 보살의 경우 귀족과 같이 보관(寶冠)과 같은 화려한 장식을 하지만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맹세를 수행하기 위해 스님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지장보살은 간혹 두건을 쓴 채로 그려진 경우도 있는데 이는 당시 스님들이 두건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보통 한손에 석장(錫杖), 다른 손에는 보주(寶蛛)를 드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편이다. 지장보살도는 단독으로 모셔진 것과 시왕(十王)을 덧붙인 <지장시왕도(地裝十王圖)>등 양식이 다양한 편이며, 현재 남아있는 고려시대 지장보살도는 대부분 일본에 있다.
③ 나한도(羅漢圖)
부처의 수준에는 못 미치나 상당한 도를 깨우쳐 부처의 높은 제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오백나한도>와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가 대표적이며, 고려시대에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를 그린 것으론 황해도 신광사(神光寺) <오백나한도>가 유일하다. 특별히 언급이 된 경전이 없으므로 부처가 돌아가신 후 가르침을 정리하기 위해 모인 오백 명의 비구들로 보는 경우도 있다.
Ⅴ. 고려불화의 색채
1. 고려불화의 색채
(1) 불화의 색채관
불교미술에 있어서는 어떤 색채가 우연한 이유 때문에 또는 순수한 미학적인 이유 때문에 선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즉, 금(金)은 부처의 절대적인 색채를 나타내는 풍요하고 성스러운 장엄의 일부분을 형성하기도 하고 또 그와 동시에 독실한 신자가 부처에게 바치는 선물과 정신적인 장식물의 기능을 한다.
부처의 몸을 금빛으로 칠하는 것을 불광(佛光), 즉 진리와 지혜라는 무한한 빛을 상징하게 되어 머리와 몸이 두광(頭光)과 광배(光背)로 둘러싸이는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고려 이전에는 한 사찰의 주불을 모시는 전각을 흔히 금당(金堂)이라 불렀다. 이것은 금인(金人)을 모시는 집, 또는 금인이 살고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또한 부처의 상의 특징을 보고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금인인데, 불상의 도상은 32상에서 불상은 금빛이 나야 한다고 규정한데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만다라(曼茶羅)의 색채는 원칙상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흑(黑)의 오색이다. 현교(顯敎)에서는 흑색을 빼고 사본근색이라 하나 밀교에서는 오정색이라고 하여 오색을 중요시하고 있다. 밀교에서 색채를 중요시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첫째, 자기를 무화하여 절대자에게 귀의하는 신앙형태라고 하기보다는 인간 세계의 생생한 감각을 긍정하고 이를 유효하게 활용함으로써 성속일체(聖俗一體)의 체험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둘째, 밀교는 색체에 상징적 의미를 내포시켜 그것을 상징으로서 감각을 통하여 직관적으로 파악하려 함에 있다. 불교는 생명 있는 총 천연색의 세계이며 그 세계를 상징적으로 5색에 의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만다라, 즉 불화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원래의 밀교에서 뜻하는 색채의 상징적 의미는 불교가 여러 나라로 전파되면서 각 나라나 민족의 특수성에 맞게 변모되어 갔다.
불화의 채색은 오채로부터 시작하였다. 오채는 음양오행 사상에 기본을 두고 있다. 음양은 일월성신의 운행과 자연현상을 인간 생활에 연관시켰고 우주 본원인 태일(太一)의 세계에는 음양의 두 기가 있다하여, 천지만물의 화성은 이 두 기의 소장(消長)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태일 음양의 철학이 수학으로 전개된 것이 역학이론이며 천문학적인 방면으로 발전한 것이 음양오행 사상이다.
오행은 색채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금ㆍ목ㆍ수ㆍ화ㆍ토의 5원소는 각각 백ㆍ청ㆍ흑ㆍ적황으로 상징되고 계절과 방위도 색깔로 표현되었다. 5원소는 금생수,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과 같이 상생(相生) 순환하여 천지 만물을 형성한다고 한다. 곧 백ㆍ청ㆍ흑ㆍ적ㆍ황의 오색과 중간색을 음양에 따라 배색하면 단청의 색채가 된다고 하였고 이것이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로 보는 것이다.
이 관계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오행절기방위색상신상목(木)춘(春)동(東)청(靑)좌청룡(左靑龍)화(火)하(夏)남(南)적(赤)전(前)주작(朱雀)토(土)토용(土用)중앙(中央)황(黃)중인(中人)황(黃)금(金)추(秋)서(西)백(白)우백호(右白虎)수(水)동(冬)북(北)흑(黑)후(後)현무(玄武)
이렇듯 오행은 천문 지리의 사상을 구현하여 방위, 절기 등이 있으며 색상을 이에 부합시킨 것이다. 이 음양오행설을 기조로 한 청ㆍ백ㆍ황ㆍ적ㆍ흑은 우리민족의 민간사상에도 깊숙이 파고들었고 특히 우리 조상들은 의식 구조상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색의 사용을 밑에는 청ㆍ자ㆍ록ㆍ남색인 청색 계열로, 위에는 적ㆍ주홍색인 적색 계열로 대별하여 사용하였다.
오방색 사용의 대표적인 예로는 고려 불화와 궁궐에서 사용했던 단청을 들 수 있는데, 이 오방색은 위에서도 거론했듯이 다섯 가지 색상이 방위와 위치에 따라 완벽한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되어 나타난다. 천장(天障)은 천상(天上)의 세계를 나타내기 때문에 천계의 신격이 표현되도록 하고, 천장을 떠받드는 부재는 오색구름과 무지개가 그려져 있으며, 기둥에서는 구름처럼 너울이 드리워져있고 기둥 아래에는 현세의 존엄성을 푸른색과 붉은 색의 단조로움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단청은 무늬마다 그 뜻이 내재되어 있는데 박쥐문은 복과 자손번창의 의미를 담고 있고, 연화문은 불교에서 대자대비와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것이다. 생활에서의 표현으로는 색동저고리가 그 예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건강과 화평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서민들도 아기의 돌과 명절 및 혼례 때에는 색동옷을 입었다. 색동에 주로 사용되어진 색은, 적 ․ 청 ․ 황 ․ 백의 4가지 정색(正色)이었으며,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간색(間色)이 첨가되어지기도 한다. 색동은 또한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무당의 옷으로도 이용되었는데, 오방색은 상징의미로 무당의 주술적 능력을 가시화 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고려불화에 사용된 색채는 오행설을 기조로 한 종교적 상징을 지니고 있다. 이 오색은 차츰 동양의 전통적인 우주철학인 오행설과 결합되었고, 우리 민족의 색채적 이론을 성립하게 되었다.
(2) 고려불화의 색채특징
지금 남아 전해져 내려오는 고려시대 불화는 후기 즉, 12세기 말에서 고려 말까지의 그림이 대부분이며 그림에는 채색화가 주류를 이루고, 선적 요소는 퇴화되어 채색을 보완해 주는 입장으로 변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로써 고려 불화를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색채의 화려함과 정교함이라 할 수 있겠다.
고려 불화 색채에서 보면 당화계(唐畵係)와 남송계(南宋系)라 하는 두 가지 흐름이 있어 전자는 유매한 색채의 것이며, 후자는 중간색을 많이 사용한 밝은 채색이 행해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고려 불화의 색채는 밝고 은은한 색조가 전면적으로 묘사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찬란한 금색이 조화되어 화려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금니의 사용은 빛의 각도와 광도에 따라, 다시 말해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 또는 움직임에 따라 변하며 각 시각마다 빛의 반사도 달라지므로 화면은 고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화면이 끊임없이 변함으로써 신비스러움과 색채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상징적인 색채를 표현하고 있는 고려 불화는 주, 녹청, 군청의 삼색을 기본으로 하여 채색을 매우 절제하고 있으며, 단조로운 채색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고려 불화의 묘사에 있어서는 붉은 색은 주로 주(朱)나 금색으로 많이 쓰였고, 그 위에 흰색의 투명한 사라(紗羅)가 어울린 관음상의 호화스러움은 고려 불화의 화려함을 한층 더해주고 있다. 암녹색과 짙은 갈색위로 붉은 색의 옷을 늘어뜨린 아미타불이나 붉은색 위로 흑색이 감도는 짙은 색의 가사(袈裟)를 걸친 지장보살의 옷은 장엄한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색채들의 장식적 기능을 위해 함께 많이 쓰인 금색은 부처의 절대적 색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고려불화는 교리내용에 바탕을 두어 내용은 신행적(信行的)으로 압축하여 일정한 의궤(儀軌) 내용을 지니고 있다. 색채의 사용 역시 외적인 색감보다 내재된 상징성이 중요시됨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즉, 불화에서의 색채는 민간신앙과 음양오행과 민속적인 것까지 아울러 지니고 있어, 고려시대 귀족적 취향이 강했고 이러한 성격은 곧 회화에도 반영되어 불화의 상징적 색채와 결합된 독특한 색채적인 특징을 띄게 된다. 이러한 불화의 특징을 세 가지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색채의 배합을 통해 느껴지는 보색대비의 조화이다. 이러한 상반된 조화는 음양과 오행에서 나온다. 이 5채(五彩)의 실시에는 반드시 주색이 있고 어느 한색이 주색이 되면 그 색에 부합되는 다른 색이 나온다. 또 대비의 색채가 주는 선명한 효과인데 적색과 녹색의 대비, 녹색과 흰색의 대비는 화면을 시각적으로 종교적인 엄숙함과 함께 화려함을 느끼게 한다.
덕천여명(德川黎明) 소장 <아미타구존래영도(阿彌陀九尊來迎圖)>에서 뚜렷이 그 성격을 찾아볼 수 있는데, 경쾌한 흰사라를 쓴 관음보살과 U자형 천의 가락이 무겁고 번잡스럽게 표현된 대세지보살 등의 예에서 보다시피 풍만하고 의젓한 형태, 흰색과 붉은색과 갈색의 현란한 색채대비, 화려한 장신구등속에 잘 나타나 있다.
두 번째로는, 고려불화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귀족적 취향이다. 이때의 색채는 붉은색과 금색이 주조를 이루었으며, 그 위에 흰색의 사라가 어울린 관음상은 더할 수 없을 정도의 화사함이 베어난다. 뿐만 아니라 암녹색과 짙은 갈색위로 붉은색의 옷을 늘어뜨린 아미타불이나 반대로 붉은색 위로 검정의 빛이 감도는 짙은색 웃옷을 걸친 지장보살의 옷은 장엄한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일본 대덕사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바위에 비스듬이 걸터앉은 풍만한 자태나 인자해 보이는 표정 등 높은 신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관음의 옷은 왕족 내지는 귀족의 옷으로 상의 황색은 왕족과 같음을 의미하며 하의 붉은색 역시 아주 귀한 신분임을 나타내고 있어 귀족적인 취향을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위의 홍산호나 백산호 역시 정토임을 의미하기 위한 소품들로 삼작 노리개에 홍산호를 달아 귀족 부인네들의 장식물로 애용한 경우를 미루어 볼 때 그들의 귀족취향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세 번째로는, 고려 불화에서 보이는 독특한 기법인 금니를 이용한 육신의 표현방법이다. 특히 1310~23년경의 <수월관음도>가 모두 금색이고, 아미타불화에서는 1320~1350년 사이에 금니가 많이 나타나며, 1350년경 <미인하생경변상도(彌靭下生經變相圖)>에도 금채가 보인다. 이 작품이 전반적으로 녹색을 칠한 부분이 많아서 화면이 밝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찬란한 금색 피부의 표현으로 고려불화의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한편 피부색을 그대로 표현한 경우에는 금색으로 된 것에 비해 보다 입체적인 표현 기법을 사용하는데, 이마에서 광대뼈 안골 주변과 턱, 삼도어깨 부분과 가슴, 손, 발 등에는 윤곽선에 접해서 유기질의 적색으로 엷은 훈담(暈淡) 처리를 하고 있는데, 이 적색의 훈담처리는 피부의 밝은 담홍색과 겹쳐져 적비색을 띠며 육신에 희미한 명암을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육신의 먹선에 접해서 피부색을 칠했기 때문에 먹선이 희미하게 흐려져 미묘한 피부의 질감과 굴곡을 표출한다.
눈의 묘사에 있어서는 섬세한 기법이 행해졌는데, 상하의 눈꺼풀의 경우 가는 먹선으로 표현하였고 윗꺼풀의 경우에는 먹선을 짙게 하였으며, 그 아래에 녹청색의 선을 첨가하여 눈에 우아함을 주고 있다. 또 흰자위는 여백으로 검은 부분은 연지에 흑색을 섞은 갈색을 칠하고 동자는 농흑으로 찍었다. 입술의 경우 연지로 칠해졌는데, 이러한 눈이나 입가에 보이는 치밀한 묘사는 머리털이 난 이마 언저리, 눈썹, 귀 털, 속눈썹까지도 한가닥, 한가닥 먹선으로 치밀하게 양식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육신부(肉身部)에는 배채를 사용하여 은은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으며, 때로는 배채에 금니를 사용하는데 이는 비단 바탕을 보호하고 채색의 탈락을 방지하려 했던 것이다.
의습선을 보면 육신의 선과 마찬가지로 먹선을 먼저 그리고 의습선에 접해서 연지를 훈담하여 상의 부드러운 질감을 표현했다. 이것은 상에 싸여진 육신부의 부드러운 양감을 느끼게 하고 오른발의 종아리와 왼발의 무릎사이에 생긴 약간의 공간에는 농묵의 그림자를 그려서 상과 육신, 상과 상의 구별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Ⅵ. 고려불화가 회화에 미친 영향
1. 고려불화와 일반회화의 관계
우리나라 회화사에 있어 불교 회화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던 때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시대이며 그 중에서도 작품이 남아있는 13~14세기의 고려 후기 작품이 중요하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고려불화는 200점을 넘지 않으며, 그 시대의 일반 회화는 더욱 그 수가 적다 하겠다. 그래서 성격은 비록 다르지만 고려 불화의 자체인 종교적 부분으로서의 의미를 넘어 자료가 부족한 고려의 일반 회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불화가 고려 시대 후기 약 한 세기 반에 걸친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 작품이기는 하나 고려 전 시대의 사회, 종교, 문화 상황을 짐작케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며 불화 안에 내포되어 있는 양식적 특성들은 고려 전후(前後)시대 그리고 다른 나라의 것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이들 일반 회화와 관련이 있는 요소들이 불화의 표현 안에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일반 회화의 다양한 양상을 보완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인물(人物), 산수(山水), 영모와 화조(花鳥), 송(松)․죽화(竹畵), 계화(界畵)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 구도와 구성, 설채법(設彩法), 필묵법(筆墨法) 등의 기법에서도 독특한 측면을 갖고 있다. 또한 불화는 당시의 일반 회화와 별다른 차이가 드러나지 않아 종교적 의미를 넘어 우리나라 회화사에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고려 불화를 단순히 종교적 측면의 작품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 의미로서 그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인물화
불교 회화에 묘사된 불․보살상들은 물론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일반 인물의 모습과는 다른 특징들을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불화 속의 인물화를 일반 인물화와 비교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하겠으나 불․보살의 경우 그 모습이 비록 일반인과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묘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그 당시 인물화법이 곁들어져 있으므로 고찰의 필요성이 있다 하겠다.
고려 불화에 보이는 불․보살의 안면(顔面) 중 정면관의 경우 대부분이 둥근 얼굴과 넓은 이마, 가늘고 긴 눈썹과 아담한 코, 작은 입, 두터운 턱, 큰 귀와 두툼한 귓 볼, 짧은 목 등이 특징을 이루는데 그 중에서도 눈은 생기에 찬 듯 보여 마치 살아 있는 듯 기운생동의 느낌을 받게 한다. 이러한 표현을 보면 이 시대의 화사(畵師)들이 기(氣)에 대한 이해와 점정(点睛)에 대한 기량을 늘 갖추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홍조가 감도는 얼굴과 작은 입술은 붉어서 귀티를 더해 주며 측면관의 경우 얼굴이 대단히 살쪄 보이고 볼이 매우 두터워 둔중한 느낌을 더한다. 이러한 표현 특징은 중모(重模)된 <이색상(李穡像)> 등 고려 시대 인물의 초상화에서도 엿보이며 의습에 있어서의 묘사 등에도 철선묘(鐵線描)가 기조를 이루어 필선(筆線)이 힘차고 생동하는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는 당시 일반 사대부 초상화와 고려 불화 사이의 시대 양식의 공유 정도를 느낄 수 있다.
(2) 산수화
고려 불화에는 때때로 <십왕도(十王圖)> 등의 배경에 산수화가 그려진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완전한 산수화가 표현된 경우는 극히 드물며 배경에 암석, 수파(水波), 수지(樹枝) 등 산수화적 요소들이 비교적 자주 보여 이것을 통해 불교 회화에 수용된 산수화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불화 속 산수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흑칠금니소병(黑漆金泥小屛)>의 한 면인 <자장보살도>의 배경에 묘사된 태조배점(太祖拜岾) 장면 주변의 산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금강산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어 일종의 실경으로서 주목된다. 노영(魯英)이 1307년에 그려 넣은 이 금강산의 모습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뽀족뽀족한 암산들의 모습이 후대의 금강산도에 보이는 첨봉(尖峰)들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려 불화의 배경에 나타나는 암석의 표현 중 수월관음도 등의 작품을 보면 청록산수(靑綠山水) 또는 금벽(金碧)산수의 전통을 보여주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청색과 금색이 화려한 바위로 그 모습이 단순한 바위라기보다는 벽옥귀(碧玉鬼)와도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는 표면에 전혀 준법이 가해지지 않고 전통을 고수하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산수적 요소의 예를 바탕으로 불화와 일반 회화간의 깊은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영모 화조화
고려 불화에는 동물과 새의 경우는 그림이 그려진 경우가 많지 않지만 꽃과 연꽃의 경우는 그 예가 많아 일반 회화와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다. 우선 조류의 경우를 보면 일본 지은원(知恩院)과 서복사(西福社)에 소장된 <관경변상도>가 주목되어지는데 이 <관경변상도>에는 연못에서 노니는 단학(丹鶴)과 공작이 그려져 있으며 <수월관음도>의 왼편 상단에는 꽃가지를 입에 문 함화청조(含花靑鳥)가 표현되어 있어 한결같이 정확함과 정교함을 보이며 기운생동하는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 불교 회화에 연꽃이 가장 빈번하게 표현되어지는데 그 표현 방법에 있어 세밀함과 정교한 묘선으로 그리고 있어 더없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장식적인 요소를 보여준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새와 꽃을 그리는 화조화의 경우는 유존 작품이 거의 없어 고려의 일반회화의 귀중한 자료가 되며, 지극히 섬세한 윤곽선으로 모양을 그린 수 아름다운 채색을 더하는 쌍구진채법(雙鉤眞彩法)이 꽃 그림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음을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4) 송죽화
고려시대에는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송(松), 죽(竹), 매(梅)가 종종 그려졌는데, 이 중 매화의 경우는 불교 회화에 있어서 그 표현된 예가 알려지지 않고 나머지 송, 죽만이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하겠다.
일본 경신사(鏡神寺) 소장의 <수월관음도>와 <나한도>를 보면 암괴 표현에 있어 곽희파 화풍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이미 고려 후기에 제법 곽희파 화풍의 수용이 폭넓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대나무 그림은 <수월관음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수월관음의 배경에 대나무가 두 그루 서 있는 것을 표현하기도 했고, 옆에 놓이는 정병에 댓가지가 꽂혀 있는 형태로 묘사되어져 있기도 하다. 청정(淸淨)을 나타내는 이러한 대나무들은 한결같이 먹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푸른색을 채색한 쌍구진채법으로 표현되어져 전통성을 강하게 보여주는데, 이는 북송대의 문동(文童)이나 소식(蘇拭) 등의 호주죽파(胡州竹派)와는 다른 묵죽화의 표현을 보인다. 또한 이런 대나무 그림들은 고려후기의 문인 화가들이나 선승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일반 묵죽화와도 현저하게 차이를 들어내고 있다.
(5) 계화
고려불화에서는 고려 시대 왕궁의 건물이나 실내장식들을 알아 볼 수 있기에 더욱 값지게 생각되어지는데, 나는 듯한 단정한 곡선미와 푸른 지붕, 그리고 붉은 단청, 금장식으로 장식된 난간, 잘 가꾸어진 정원과 연못 등이 어우러져 건축미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기왓골은 가는 곡선과 진먹선으로 표현되어지며, 섬세한 금선을 사용하여 그려진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선들은 대단히 숙달되고 능숙한 기량을 보이는 표현이라 하겠다.
이런 계화들의 표현은 다소 실제의 모습 이상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왕실 건축의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려 시대에 있어서의 건축사 연구에서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으며 계화들 역시 다른 주제의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하고 정교하며 귀족적 아취를 물씬 풍기는 고려 불화의 특성을 돋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겠다.
2. 한국 채색화에 미친 영향
색은 어느 민족이나 사용하고 있으며 민족마다 색의 상징 표현이나 그 사용 의미가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색채에 대한 변화, 발달은 미술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구려의 고분 벽화, 고려의 불화 그리고 조선 시대의 민화로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오방색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현대 채색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려시대 불화는 단순히 종교적 의미나 미감(美感)의 수준을 넘어 궁중 취미 또는 귀족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서 세심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움과 호화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밝고 화려함을 바탕으로 하는 고려 불화의 양식이나 색채적 표현에 있어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인다. 화려함과 섬세함, 그리고 날카로움 속에서 배어나오는 부드러움은 독특한 개성을 지니며 밀교에 의한 원색적 채색을 바탕으로 화려하고 한정된 색, 즉 오방색과 금니에 의한 섬세한 그림들을 선보인다.
색채적 표현은 음양오행적 사고에 입각한 오색이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우리나라만의 독자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훗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에 있어 일관되게 나타나며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듯한 소박미의 경향성을 담고 있다. 이런 한국적 미의특성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채색화의 근간을 이룬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불화가 아닌 민중 미술로서 그 변모를 꾀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서는 민화를 들 수 있다. 민화는 색채 표현에 있어 극채색을 사용하여 시각적 효과를 높여준 것으로 이는 고려 불화에 쓰여진 기법 등이 전수되어 표현화된 것이라 본다.
이렇듯 고려 불화에 있어서 색채 표현의 특수성은 표현의 방법인 구성과 구도, 필묵법 등의 표현에 비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 채색화 발달에 있어서도 그 중요성은 크다 하겠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불화적 색채관은 민화를 통해 그 특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오방색 중심의 색채를 바탕으로 색상의 폭이 넓어지고 주제가 다양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민화 중 진채화로서의 대표적 작품은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로 강력한 색상 대비와 화려함,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특성을 지닌다. 특히 태양과 소나무의 붉은 색과 파도와 낙수(落水)의 흑백 대비는 자연의 웅장함과 유기적 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 색상의 밝음은 시각적 화려함과 장식적 아름다움 그리고 유교적 이념의 종교관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민화는 음양오행 사상에 근거한 강한 원색을 바탕으로 현세기복을 바라는 주술적 신앙의 의미와 민중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화려한 색채의 장식성 그리고 순박한 정서가 내포되어 다양한 소재로 표현되어져 왔다. 이러한 오방색적 특징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의 채색화 작업에도 도입하여 표현되어져 왔는데, 그 대표적 예로 박생광의 작품을 논할 수 있다.
박생광의 작품을 보면 불교가 정신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주제나 색채적 표현에서 느낄 수 있다. 특히 고려 불화에서 볼 수 있던 오방색 중심의 색채는 화려하면서도 기교를 부리지 않은 모습 속에서 작가의 소박함과 전통적 기법이 드러난다. 그의 작품 <무녀>를 보면 압도당하는 듯한 거대한 크기와 원색적인 오방색 표현으로 단청이나 탱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의 작품 대부분에서 이런 불교적 요소의 색채를 느낄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고려 불화에 대한 색채관이며 전통적인 한국인의 색채적 표현인 것이다.
이렇듯 훗날 작품을 통해 우리는 쉽게 한국적 채색화가 불화의 색채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Ⅶ. 결론
고려 시대 미술은 인도와 중국 송의 양식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독창적 세계를 재창출하여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그 양식적 특성이 부각되어지며, 시기적으로 일반 회화 양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상황이기에 미술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그리고 고려 불화는 국가의 보호와 귀족들의 관심속에서 그 영향력을 더해가며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색채의 사용에는 주, 녹청, 군청의 삼색을 기조색으로 중후하면서도 단순한 색채적 표현을 나타내며, 금색의 사용으로 화려함과 호화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유려한 묘선의 사용은 세밀함을 표현하고 다양한 문양으로 변화를 나타내어 아름다움과 전체적인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의 바탕에는 불교 사상인 정토사상과 밀교가 배경을 이루고 있는데, 정토사상은 고려불화의 공간성과 정제성에 영향을 미쳤고, 재래 신앙을 수용한 밀교는 불화 제작의 요구를 확산시켰으며, 원색적 채색을 사용하여 화려함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를 마련한다. 또 다른 양식적 특징으로는 섬세하고 다양한 문양, 철선묘(鐵線描)와 곡선미의 유려함이 세밀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되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고려 불화는 양식에 있어 뛰어난 감각과 독창성을 나타내는데, 이보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색채라 하겠다. 고려 불화의 색채 표현은 오방색이 중심을 이루며 그 위에 금니로 선묘하여 복층적 묘사를 통한 심오한 정신 세계를 표출해 내고 있다.
이러한 불화적 색채관은 훗날 조선 시대에 이르러 민중 미술인 민화로서 표현되어지는데, 극히 서민적이고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된 원색적 색채와 고려의 기법적 요소가 전수되어 화려하고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현대 한국 채색화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고려 불화가 갖는 의미는 단지 회화사에 있어 채색화의 아름다움을 표현, 발전시켰다는 가치적 요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색채를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근간으로 있었고, 큰 영향을 주었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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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성복(sungbok.com), 곽현우 외 6인
Ⅰ. 서론
불화는 다른 일반 회화와 달리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개성의 표현을 넘어 불교적인 이념에 입각한 주제를 그려야 하는 성스러운 예술이며, 인간을 교화시키기 위한 목적을 바탕으로 불교세계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교 미술은 인도에서 발생한 후 여러 나라에 전파되어 각 민족 고유의 역사와 사상에 맞게 결합하여 새로운 믿음과 문화가 형성되었고, 그것은 전통과 지역 및 민족적 특수성에 적응된 독자적 미술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하는 바탕이 되었다. 한국에 있어서의 불화도 우리 민족 고유의 미의식에서 출발하여 종교적 목적 달성과 민족의 생활양식이 표출된 회화라 하겠다. 특히 고려 불화는 조상과 함께 예배의 대상이었으며 사원을 꾸미고 불교 사상을 대중들에게 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것은 인간 내면세계에 대한 믿음의 산물로서 순박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표출된다.
이와 같이 한 시대를 대표했던 불화는 종교로서의 기능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 측면까지 그 영향력을 넓혔다. 이는 앞으로 논문에서 살펴보겠지만, 불교 미술의 양식과 색채적 특징에 있어 우리 민족의 시대적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새롭게 표현되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예술적 가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1. 고려 불화의 기원, 2. 시대적 배경, 3.고려불화의 특징, 양식, 종류, 4. 고려불화의 색채, 5. 후대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시대적 변화에 따라 종교화인 고려 불화가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미술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Ⅱ. 고려불화의 기원
1. 불화의 기원
불화의 명확한 기원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불화도 불교조각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성립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초기의 불화로서 남아있는 예가 없어 미루어 짐작할 뿐이며, 여러 경전을 통해 초기의 불교사원에 불화들이 그려졌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권제(卷第)23, 율부(律部)에서, 석가시대에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세운 불교 최초의 사원 기원정사(祈園精舍)에 불화를 장식한 기록이 보이는데, 사원의 건물이나 용도에 따라 불화를 각기 다르게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약차(藥叉), 본생담(本生談), 불전도(弗傳圖), 해골(骸骨)등 교훈적이고 장엄적(壯嚴的)인 그림을 그렸다. 물론 석가 생존 시에 위의 내용과 같은 그림이 실제로 그려졌는지는 의문이나, 이 경(經)이 성립된 B.C 2~3세기 경에는 적어도 사원의 수호 및 장식, 일반 대중의 교화를 위한 그림이 그려졌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예배 대상으로서의 존상화(尊像畵)들은 대승경전인 『현우경(賢愚經)』이나 『현겁경(賢劫經)』등 몇몇 경전에 보이고 있다. 이 경(經)들에서는 화사(畵師)들이 부처님의 형상을 그려 예배하고 공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곧 예배 대상으로서의 본격적인 불화가 제작되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진 최초의 불화는 아잔타(ajanta)의 벽화로 알려져 있으나, 이 작품들은 B.C 2 세기 경에 그려진 것이어서 부처 생존 당시인 초기 불교시대의 불화는 알 수 없다. 단지 경전에 나타난 내용을 바탕으로 그 존재여부만을 짐작하게 한다.
2. 고려불화의 기원
불교가 전래된 4세기 이후 삼국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으며, 그에 따른 불교회화도 상당수 제작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우리나라 불화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원효스님 등 10성(聖)의 화상을 불․보살상과 더불어 그렸다고 하나 이 작품역시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다만 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화엄경변상도(華嚴經變相圖)>가 수년전에 발견되었는데, 이 사경화(寫經畵)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불화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불화는 주로 벽화 형식으로 사원의 소멸과 함께 사라져 지금 남아 있는 불화는 거의 없는 형편이나, 고구려 시대의 여러 고분벽화에 불교적인 요소의 그림이 남아 있어 당시의 불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우수한 불화가 상당히 많이 제작되었는데, 고려시대는 왕실불교라고 불릴 만큼 귀족들에 의해 불교가 성행하면서 불화 역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고려불화는 지금 현재 80여점이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호암미술관 3점, 호림미술관 1점, 국립박물관 1점 등 5점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Ⅲ. 고려불화의 시대적 배경
고려 태조가 후고구려를 없애고 새로운 왕조 고려를 세운 해가 918년이고, 후삼국을 통일한 때가 936년이다. 초기의 고려 즉, 제 2대 혜종(惠宗, 944~945)부터 제 3대 정종(定宗, 946~949) 때까지 후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지방 세력가들이 호족연합과의 동조로 막강한 세력을 갖고 고려의 정권을 지탱해 나갔다.
고려가 새로운 모습으로 갖추어지는 시기는 제 4대 광종(光宗, 950~974)때 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노비안검법과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관료 제도를 정비하고 경제적, 군사적 중앙 집권화를 시도했다. 이런 바탕을 근간으로 하여 성종이 고려적인 모습의 사회, 즉 관료적 중앙 집권 중심의 귀족사회를 완성시켰다. 관료적 귀족사회는 이에 알맞은 사회 문화를 창조해 내었으며, 유교에 의한 현실적 정치 제도를 정비하고 정신문화로서는 불교를 채택하였다.
한편, 우리 역사상 불교에 의해서 나라가 세워지고 이런 전통이 끝까지 지켜진 유일한 나라는 고려밖에 없다. 고려는 시종일관 불교가 국교로 행세한 철저한 불교국가였던 셈이다. 그래서 서울 개경에 법왕사(法王寺), 왕륜사(王輪寺)등 10대 사찰을 세우고 후백제군을 격파한 충남 연산에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하는 등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신라의 서울 경주에서 각 종파의 조사들을 초청해서 개경에 그들의 본사를 건립하도록 했다. 더욱이 각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그들 세력 아래에 있는 사원들을 크게 증축하고, 태조에게 조력한 많은 사원들도 대대적으로 수축했던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국초부터 건국의 이념이 되었고 국교로 공인되었기 때문에, 융성을 극하던 신라 불교를 계승하여 관료적 귀족사회에 걸맞는 귀족불교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의 불교는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이 백중세를 이루면서 모든 사람들의 귀의를 받고 있었지만, 귀족사회에 알맞은 교종이 점차 대세를 잡아가고 있었다. 선종이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까지의 호족사회에 알맞은 호족불교였다면 이러한 호족불교는 고려가 안정되면 어차피 시정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것은 호족연합의 세력 기반 위에서 후삼국을 통일했던 고려가, 이제 사회의 안정과 더불어 귀족 중심의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면, 알맞은 형태의 불교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 불교야말로 귀족사회에 알맞은 교종의 귀족불교(貴族佛敎)인 것이다.
교종은 신라 당시 오교(五敎)가 있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보다는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전통이 고려에도 내려와 많은 종파가 난립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교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종파가 화엄종과 법상종이었다. 화엄종은 원효의 법성종 또는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과 의상(義湘)의 화엄종 등이 있으며, 화엄종은 신라 이래 가장 저명한 종파를 이루었다. 화엄종의 교리가 불교의 진수이므로 모든 불교종파는 화엄종을 위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종지(宗旨)였다. 이들 교종의 성행에 힘입어 잡다한 종파를 통합하고자 해서 화엄종의 대각국사(大覺國師)는 천태종을 크게 중흥시켰던 것이다. 천태종은 신라 이래 고려에서는 중국 송나라에 역수출했을 만큼 화엄종에 버금가는 종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고려적인 불교사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미술은 불교미술이며, 그것은 화려한 귀족 취향의 미술일 수밖에 없다. 오랜 귀족사회의 지속은 여러 가지 폐단을 몰고 오기 마련이다. 문신들을 위주로 한 문벌귀족들의 지나친 세력 팽창과 광대한 토지의 겸병으로 인한 경제구조의 파탄 등, 갖가지 모순들이 사회를 극도로 혼란시켰다. 이 가운데 가장 심각한 모순이었던 무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격하는 마침내 무신난(武臣亂)이라는 혁명의 회오리바람을 몰아오게 하였다. 이 무신난은 여러 가지 면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우선 문벌을 중심으로 한 문신귀족들의 질서 체계가 무너지고, 무력에 의한 힘이 사회의 질서를 이루게 되었다. 왕은 이제 명목상의 최고 통치자일 뿐이고, 무신 실권자가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였다. 이들 무신을 중심한 실권자들은 전대 문신들보다 한층 더 막대한 장원을 소유하게 되었고, 따라서 고려의 경제적 질서는 정치적 질서와 병행해서 귀족사회의 사회체제를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에 농민과 노비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는 커다란 요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인시대의 정신적인 뒷받침은 교종불교와는 다른 선종불교가 담당하게 된다. 무인들의 직선적인 성격에는 난해한 교리보다는 직설적인 선리(禪理)가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다는 이유도 강했으며, 더구나 문신귀족들의 교종은 무신들을 적대시하여 언제나 호시탐탐 무신타도의 기회를 포착하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무신들은 자연히 귀족불교시대에 푸대접받던 선종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불교를 성격 짓는 것은 바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조계종(曹溪宗)이다. 보조는 선교통합을 주장하면서 그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치게 되는데, 이것은 전대의 천태종과 또 다른 면에서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대는 따라서 전대와는 다른 미술양식이 성립되고 있었으며, 그것은 선종의 불교사원이 주도하는 불교미술과 여기에 영향을 받은 무인시대 문인들의 미술이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인시대는 강대한 원(元)의 장기간에 걸쳐 자행된 지루한 침략으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무너지고 만다. 이후 약 일세기간에 걸쳐 원의 집요한 강압정책과 원(元)세력과 결탁한 권문세가들의 사회적․경제적 진출로 인한 새로운 사회질서가 확립되었고, 원이 물러간 후 구세력의 타도에 힘입어 새로운 사대부 계층의 등장 등으로 새로운 사회체제가 이루어진다. 이 사대부 계층은 결국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조를 세우는 세력이 된 신흥세력이다.
이처럼 고려 말기인 14세기 후반기로 접어들면 신진 사대부들의 진출이 급격히 늘어나고, 이에 따라 신유학인 성리학이 불교를 대신해서 당대의 세력을 휘어잡게 된다. 이 당시는 권문세가들이 방대한 장원과 수많은 노비들을 거느리며 당당한 세력가로 행사하면서 일종의 영주 구실을 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발맞추어 사원들도 권문세가들 못지않게 거대한 사회적 경제적 세력으로 부각된다. 따라서 당대의 불교는 권문세가들에 알맞은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호사를 극한 불교였던 것이다. 이러한 권문세족들과 불교세력에 반대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신흥 성리학파이던 사대부 계층이었다. 즉 호사를 극하던 미술의 등장인 것이며, 여기에 반기를 든 사대부들의 미술이 대두한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불화의 발전이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불화는 이들 왕실을 중심한 권문세족들의 시주에 의한 것들이며, 이 그림들은 당대의 사회적 성격을 그대로 반영이나 하듯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고려불화에는 예리한 관찰과 직관으로 전신의 흐름을 압축해내는 강인한 내면 지향의 세계가 내포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정신 세계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선불교(禪佛敎)정신의 영향이 매우 크다. 또한 고려사에서 발견되는 신앙 의례에 의하면 고려의 불교 신앙은 밀교 사상과 정토 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려 시대의 불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시대의 밀교는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한 화엄 밀교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불화 주제의 다양성과 고도로 발달한 상장적 체계를 이룩함으로써 신비감의 극치를 이루었다.
주제에 있어서도 정토신앙(淨土信仰)이 바탕이 되는데, 정토교란 넓은 의미로 말하면 불국토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대승 불교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좁은 의미로 말하면 아미타의 극락 정토교를 말한다. 이 같은 정토교는 급기야 극락의 모습을 구상화하여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의 모습을 갖춘 불화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한편 정토교의 교설은 극락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조화성을 강조한다. 이런 정토교의 영향으로 고려불화는 정교하고 세밀한 묘사로 고유한 특징을 갖게 된다. 그리고 현존하는 고려 불화에서 정토교를 주제로 한 불화와 관음(觀音) 종류의 불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고려 불화에 미친 정토교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밀교와 정토사상, 그리고 선 사상을 고려 불화의 표현 기법에 있어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역사적으로는 잦은 전쟁과 내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불교라는 종교적 상징을 통해 귀의(歸依)하게 만들었다.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현실에 대한 극복과 저항적 이미지의 표출보다는 현실도피를 택하면서 아름다움에 몰입하고 탐닉하는 경향으로 화사하고 섬세함의 극치를 보인다. 즉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인 현실을 잊고 극락정토를 꿈꾸며 아름다움인 탐미주의로서의 표현을 나타내는 것이 고려 미술의 특징이라 하겠다.
Ⅳ. 고려 불화의 양식
1. 특징
고려(918~1392)는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였던 만큼 최고의 기량을 지닌 작가가 불화 제작에 참가했기 때문에 고려 불교의 심오한 사상이 불화에 잘 나타나 있다. 현재 고려불화는 140여 점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일본에 있고 우리나라에는 일부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불화를 통해 보면 <아미타불화(阿彌陀佛畵)>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지장보살도(地裝菩薩圖)>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대개 고려 후기인 14세기에 제작된 불화들로 한 시기에 한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화들은 현세의 안녕이 내세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미타 신앙에 의탁한, 권문세가의 현실적 종교관을 엿보게 한다. 좀 더 자세히 고려불화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른 시대의 불화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발견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로, 아름다운 구도이다. 인물이 많은 군도(群圖)일 때 고려불화는 매우 독특한 화면구성을 하고 있다. 아래 위의 상하 2단을 구별하여 위는 본존불, 아래는 협시보살을 배치하는 2단 구도를 표현하고 있다. 본존 무릎 위로 본존 의외(以外)의 협시가 전혀 없는 화면 구성은 본존의 권위를 극대화시킬 뿐만 아니라 본존에게 시선을 집중시켜 주는 효과를 주고 있다. 여기에 머리 주위로 둥근 금선(金線)의 두광(頭光)과 신체를 둥글게 감싼 신광(身光)은 금빛 찬란해서 불상을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구도의 아름다움이 적용된 예로는 <아미타구존도(阿彌陀九尊圖)>,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경변상도(輕邊相圖)인 <미륵하생변상도(彌勒下生變相圖)>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려불화에서 발견된다. 2단구도 외에도 삼각구도나 두손 모아 들어올리는 구도, 그리고 <내영도(來迎圖)>나 <나한도(羅漢圖)> 또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처럼 대각선이나 측면관으로 자유분방하게 화면을 구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두 번째로, 불․보상들의 형태이다. 얼굴이 단아하고 신체가 단정한 모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얼굴이 둥글면서 단정하고 우아할 뿐만 아니라 체구 또한 반듯하고 아담하며 단정한 형태여서 한마디로 단아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불화의 불․보상의 형태가 모두 단아한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 1320년 전후해서 단아한 형태미가 최고조에 이르는 것 같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정가당 소장 지장시왕도 협시 가운데 제석(帝釋)․범천(梵天)같은 화면은 유난히 풍만한 모습의 형태미를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건장하고 풍만한 형태는 13세기 불화에서 주로 나타난다.
세 번째로, 고려불화의 화면을 가장 눈에 띄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색깔이다. 색깔은 불화의 생명을 좌우하는데 고려불화의 색깔은 맑고 밝으면서도 튀지 않는 은은한 중간색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슴에 와 닿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이런 아름다움은 특히 붉은 색 가사(袈裟) 빛깔 때문으로 생각된다. 1286년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오른쪽 어깨를 덜어내는 듯한 우견편단식의 통견착의(通肩着衣)로 대의(大衣)를 입고 있는데, 밝고 선명한 금선 주름과 금선으로 된 큼직한 꽃무늬가 배치되어 호화찬란한 색깔을 연출하고 있으면서도 은은함과 고귀함을 잃지 않는다. 붉은 가사 밑으로 주름진 하의는 녹색 바탕에 금무늬가 그려져 있어 적녹(赤綠)의 대비효과가 절묘하다. 이런 적녹의 기본색은 거의 대부분의 고려불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고려불화의 색이다. 이러한 대비효과는 바탕색에 의하여 한층 선명히 드러난다. 고려불화의 바탕색은 대개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는 갈색이기 때문에 밝고 화려한 붉은 색조가 한결 선명히 부각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려불화를 특징짓는 것은 화려한 금선으로 순금색을 옷주름의 유려한 선묘나 가사의 화려한 꽃무늬에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광배(光背) 테두리, 대좌(臺座)의 무늬, 심지어 보관(寶冠)의 장식무늬에까지 어디에나 쓰여지고 있다. 이러한 금선(金線)의 사용은 중국이나 일본 불화에서 발견할 수 없는 고려불화만의 주요한 특징이다. 고려불화의 황금 빛깔은 호화롭고 고귀하게 화면을 구성해 고상한 왕실 귀족적인 분위기, 더 나아가 극락(極樂)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네 번째로, 제작기법을 들 수 있다. 고려불화의 특징적인 제작기법으로 복채법(伏彩法)을 들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화면 뒤에서 칠을 하여 안료가 앞으로 배어 나오도록 하는 기법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신체나 옷 등에 주로 사용하는 기법으로, 뒤에서 백색 안료를 칠한 뒤 앞면에서 다시 붉은색이나 황토색 계열 안료를 엷게 칠하여 부드러운 살색을 연출하거나, 붉은색을 화면 뒤에서만 칠해 은은한 파스텔톤의 색감을 연출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화풍의 양식적인 경향을 들 수 있다. 고려불화에는 자연주의적, 그리고 형식주의적인 화풍의 경향이 나타난다. 자연주의적 화풍의 경향은 1300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경향으로 밝고 산뜻한 색채, 유려한 묘선, 동적인 상용(像容) 그리고 온화한 화취(畵趣)를 지니고 있다. 형식주의적 화풍의 경향은 14세기 전반 이후의 작품에서 보이는 경향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지고 상용에 움직임이 적어지며, 평면적이고 경직화한 화취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화풍의 변화에 걸맞게 문양, 이마선, 입술 등 화면을 구성하는 여러 모티프의 형상도 변화한다. 이러한 형상적 변화는 고려시대 후기불화의 연대관(年代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여섯 번째로, 고려불화 특유의 제작배경에 관한 것이다. 아미타 신앙을 대상으로 하는 고려시대 후기불화의 밑바탕에는 아미타신앙을 기본으로 하여 밀교사상이나 법화경 신앙과의 융합이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14세기 중기 이후의 아미타여래계 불화에는 말법사상(末法思想)도 더해져서 그때까지 제작된 적이 없었던 아미타팔대보살도, 관음․지장보살병립도 등 다양한 도상이 만들어졌다.
2. 제작 순서
불화를 그리는 기법은 재료의 바탕에 따라 다르다. 고려의 불화는 벽화보다 탱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종이나 베에 그리는 그림을 위주로 제작 순서를 설명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불화를 그리는 작업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계는 그림 바탕을 다듬는 준비 단계로써 베나 종이를 판판하게 마름하고 여기에 정분(흰색)과 아교나 부레를 덧칠한다. 이렇게 한 그림 바탕을 초지(草紙)라고 하며, 이 단계만을 전문적으로 전담하는 화승(畵僧)을 가칠장, 또는 개칠장이라 한다.
둘째 단계는 가칠이 끝난 바탕에 먼저 초칠, 즉 초상을 한다. 초상은 밑바탕 그림으로 곧 묵선(墨線)으로 된 모본 그림인데 모본은 주로 우두머리 화승이 직접 그려 화본(옛 그림본)을 자기 나름대로 변화를 시킨다. 그런데 벽화나 나무(단청)에는 먼저 화본지(그림종이)에 묵선으로 그려, 여기에 바늘이나 송곳으로 촘촘히 구멍을 뚫어 이것을 가칠한 초지(바탕)에 대고 분을 뿌리면 윤곽선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초칠이라 하며, 이 윤곽선에 따라 선을 긋는다. 이 초상이 끝나면 채색을 입히게 되는데, 채색하는 사람도 채색에 따라 각각 다르다.
셋째 단계는 마무리하는 단계로서 그림이 완성되면 종이나 베일 경우, 족자나 병풍을 하여 오동기름이나 들기름 등을 바르게 된다. 이것은 방수나 방습, 또는 방충에도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단계는 우두머리 화승의 지휘에 따라 분업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절차와 까다로운 법도가 함께 따랐다.
3. 제작 기법상의 특징
(1) 채색(彩色)
고려불화는 제작된 지 600년 또는 7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것들이어서 원래의 상태에 비하여 부분에 따라서는 적지 않게 변화되었으므로 표현의 현상만으로는 사용된 안료의 종류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 대부분이 그저 붉은색, 푸른색, 또는 노란색이라는 추상적인 용어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그러나 실사(實査)를 통해 살펴보면 고려불화에 사용된 안료는 주로 주(朱), 녹청(綠靑), 그리고 군청(群靑)이다. 이 삼색은 고려불화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거의 모든 여래상 가사(袈裟)의 바탕은 주(朱)로 전면을 칠하고 있고, 대의(大衣)에는 녹청(綠靑), 치마에는 군청(群靑)을 사용하고 있다. 이 세부분이 실제 전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 사용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고려불화는 주(朱), 녹청(綠靑), 군청(群靑)의 삼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채색을 매우 절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단조로운 채색임에도 불구하고 고려불화가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안료의 사용법이다. 즉 가장 많이 사용된 주, 녹청, 군청을 비롯하여 황토계(黃土界) 등 눈에 보이는 색은 모두 원색으로 고려불화의 색채는 이처럼 원색을 그대로 사용하였을 뿐, 안료를 혼합하여 쓰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안료를 혼합할수록 채도가 떨어져 탁해 보인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성질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중간 색조를 띠고 있는 것은 변색에 의한 효과도 생각해 볼 수 있겠고 혼합의 가능성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바탕칠을 한 위에 다른 색감의 안료를 덧칠함으로써, 즉 이중의 채색으로 인하여 나타난 효과일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난 그림이 지금까지도 선명한 아름다운 색감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세심한 안료의 운용 방법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금니(金泥)의 적절한 사용이다. 고려불화의 금색은 모두 순금을 사용하고 있는데, 육신부(肉身部)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윤곽선, 옷 주름선, 그리고 각 부분의 표면을 장식하는 각종 각양의 문양들이 금니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곳곳에 사용된 금니선은 바탕 면적의 크기와 색의 상태에 따라 때로는 가늘고, 또는 굵어 채색의 표현의도를 저해한다든지 번잡스럽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당시의 제작자들에 있어 금니는 단순한 채색이 아니라 혼신을 다했던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한 필연적인 도구로 생각되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한 가지 부언할 것은 금박을 가늘게 잘라 붙이는 소위, 절금(切金)이라 불리는 기법은 현존 고려불화에서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기법은 주로 일본불화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그림의 국적을 밝혀내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2) 묘선(猫線)
우선 육신부의 묘선은 대부분의 경우 얇은 먹선으로 윤곽을 잡고 그 선을 따라 다시 얇은 주선(主線)을 그어 나타냈으며 그 이중선 위에 주로 엷게 바림하여 입체감을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먹의 윤곽선이 없고 약간 굵은 주선만을 사용한 경우도 보이나, 이런 경우는 대부분의 화풍상 형식화의 경향이 보이는 작품들로서 14세기 중반 이후의 그림들에서 많이 보인다.
법의의 윤곽과 옷 주름은 기본적으로 얇은 먹선으로 묘사하든지 그 선을 따라 다시 굵은 먹선으로 강조한다든지 하였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 선을 따라 금니선으로 강조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일종의 하이라이트 효과를 얻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기본적인 방침으로 그 묘선들은, 베일은 투명한 듯이 묘사해야 한다는 표현의지에 어울리게 매우 섬세하고 유연하다. (한편 고려불화는 먹선과 주선, 금니선만이 아니라 예는 적지만 황토계, 녹청계 등의 색선을 사용한 경우와 나완도처럼 농담과 굵기를 달리한 먹선만으로 형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경우가 있음도 지적하여 두고자 한다.)
(3) 육신부(肉身部)
세 번째는 육신부의 표현기법에 관한 것으로, 이 부분에는 화면 뒤에서 칠을 하여 안료가 앞면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복채법(伏彩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복채법은 기법상 그림 뒷면의 배접지를 제거하여야만 관찰이 가능하므로 그런 기회란 전면적인 수리를 할 때가 아니면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표면의 면밀한 실사를 통하여 확인 가능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려불화의 육신부 복채는 주로 백토로 짐작되는 백색안료를 사용하였으며, 앞면에서 다시 주(朱)나 황토계 안료를 엷게 칠하여 부드러운 살색을 연출하고 있다. 고려불화의 복채는 육신부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복채의 방법은 육신부 전면 또는 가사 전면을 같은 색으로 칠하는 경우와 좀 더 세분하여 바탕과 장식을 그에 어울리는 색으로 각각 달리 칠하는 경우,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복채를 한 후 앞면에서 의도적으로 색을 칠하는 경우와 색을 칠하지 않고 효과를 그대로 살리는 경우도 있다.
복채의 목적은 물론 추측에 지나지 않겠지만, 물리적인 면에서 보면 색을 뒷면에 칠하였기 때문에 안료가 떨어져 나갈 염려가 없고, 앞면에서도 두껍지 않고 얇은 채색만으로 의도한 색채감을 얻을 수 있어 역시 화면 손상으로 인한 원래 모습의 상실 가능성이 훨씬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표현의 면에서 보면 고려불화의 경우는 앞서 언급했듯이 원색을 사용했을 뿐 안료를 혼합하여 중간 색조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복채를 하고 그 위에 다시 채색을 함으로 자연스럽게 부드럽고 깊이 있는 배색의 효과를 얻으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4) 문양(文樣)
고려불화에 사용된 문양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각종의 문양의 표현되는 장소에 따라 종류를 달리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의 통일성이 엿보이는데, 이는 문양사용에 있어 기본적인 규칙이 있었는지, 아니면 묵수적인 전통의 계승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예를 들어 여래상의 문양으로는 가사에는 연화당초원문(蓮華唐草圓文)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대의(大衣)에는 거의 모든 그림에 공통적으로 구름과 봉황의 운봉문(雲鳳文)이 표현되며, 치마에는 타원형의 연화문과 연화당초문 그리고 예는 적지만 구름무늬도 사용하였다.
이처럼 여래상에 사용된 문양은 종류가 단순한 반면, 관음보살상에 사용된 문양은 좀 더 다양하다. 즉 치마의 바탕무늬는 대부분 귀갑문이며 그 위에 상하대칭의 타원형 연화문을 그려 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고, 귀갑문을 대신하여 칠보문을 사용한 예도 보인다. 그리고 치마의 가장자리는 공통적으로 모단당초문(牡丹唐草文)으로 장식하고 있다. 베일의 문양은 바탕에 마엽문(麻葉文)을 전면에 그리고 그 위에 연화당초원문, 연화원문, 그리고 화원문, 예는 적지만 운봉문을 적절한 크기로 배치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들 문양들은 모두 금니(金泥)로 그려졌으나 한진미술관(恨津美術館)소장의 <아미타삼존도Ⅱ>처럼 군청을 사용한 경우와 극히 일부분이지만 정법사(正法寺)소장의 <아미타여래도>와 같이 은(銀)을 사용했다고 보여지는 예가 전해지고 있다. 문양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부동원(不動院)소장의 <비로자나불도>처럼 신체는 물론 화면 전체를 부처와 보살의 모습으로 가득 채운 그림도 있다. 그리고 원문(圓文)인 경우 원의 테두리를 두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나 금니 또는 백색의 선으로 윤곽을 잡은 예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편 고려불화에 사용된 문양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형상이 다양하여 주목되는 것은 연화당초원문(蓮華唐草圓文)이다. 이 문양은 고려시대 13 ․ 14세기 불화의 대표적 문양으로, 그 형상의 변화 추이만으로도 고려불화의 편년이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능할 정도로 일관되게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양은 중국은 물론 일본의 어느 시대 어느 종류의 불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는 고려불화만의 독자적인 문양으로 현재로서는 이 문양이 사용된 불화라면 고려시대 13․14세기에 속하는 그림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어 국적 판별의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한편 일본 등에 전하는 불화 가운데 도상이 고려불화의 범주에 속하고 화풍과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연화당초원문을 사용한 예가 있는데 이것들은 후대에 일본에서 제작된 모사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화당초원문은 고려 화가들이 고안해낸 독창적인 문양이며, 고려불화 특유의 아름다운 불세계(佛世界) 창출해내기 위하여 그들이 얼마나 노력했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좋은 단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문양은 그림의 제작시기의 추정과 국적을 밝혀주는 요소라는 점에서도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묘법을 염두에 두고 고려불화의 제작기법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불화는 주, 녹청, 군청, 그리고 금니로 대표되는 채색법, 전면을 가득 메우는 각종 각양의 문양, 그리고 장신구 등 화면구성 요소 하나하나를 보면 자기주장이 강하여 전혀 서로 조화를 이룰 것 같지 않게 보이며, 오히려 불가능할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실제는 신비롭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전체적인 조화가 뛰어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할 수 밖에 없게 하는 지고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화면구성 요소들이 지닌 특질을 정확히 파악하여 효과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즉 고려불화의 바탕색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단지 주, 녹청, 군청의 삼색이 주류를 이루고 잇을 만큼 종류가 적다. 그리고 바탕색들은 각 부분에 있어 농담의 차이는 물론 명도의 변화도 시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한 작품 속에서 다른 부분일지라도 일관되게 같은 느낌의 색을 사용하고 있다. 주를 예로 들어보면 단독상은 물론 군상인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는 같은 상태로 채색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불화는 채색에 있어 색감의 미묘한 변화를 거의 시도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색채의 단순성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얇은 묘선은 중복하여 그음으로 하여 층을 만들어 가며 면을 작게 구분하였고, 그 위에 다시 문양을 그려 넣음으로 해서 화면에서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하였다.
4. 고려불화의 종류
(1) 불화의 소재에 따른 구분
1)벽화(壁畵)
벽화는 사원의 내외 벽면에 그려지는 그림으로써 사원을 장엄하기 위한 그림이다. 우리나라는 토벽이 있는 목조건축(木造建築)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토벽화(土壁畵)가 주류를 이루지만 이 외에도 석벽화(石壁畵), 판벽화(板璧畵)가 있다. 또한 목조건축의 외벽(外壁)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목재 벽에도 불화(佛畵)를 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판벽화 혹은 판벽불화(板璧佛畵)라 부른다. 판벽화의 경우 대개 수명이 짧아 오래된 작품은 보기 힘들고 보광사(普光寺) 판벽화, 흥국사(興國寺)판벽화 등으로 명맥을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석벽화는 석굴사원의 석벽에 그려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선 기록으로 존재를 확인 할 수 있을 뿐 실존 유물이 없다. 하지만 인도의 아잔타석굴과 돈황의 운강석굴(雲崗石窟)등에서 오래된 석벽화가 전해지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발전한 불교는 불교의 도입과 함께 불교미술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벽화의 경우 남아있는 것은 없으나 연꽃, 비천(飛天)과 같은 불교적 문양과 소재에서 벽화의 확인을 가능하게 해준다. 기록상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솔거(率居)가 그렸다고 하는 황룡사 노송도(黃龍寺 老松圖)가 있으며 고려시대의 벽화로는 중국 상국사(相國寺)벽화를 옮겨 그렸다고 하는 흥왕사(興旺寺)벽화, 선원사 비로전 벽화 등 다양한 기록이 전해지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부석사 조사당(浮石寺 祖師堂)벽화가 유일하다. 벽화의 경우 이동이 불가능하고 손상을 입으면 새로 그리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탱화의 유행,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을 통한 사원의 훼손 등은 물론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에 따른 사원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벽화의 조성(造成)이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초기의 벽화도 소수만이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2) 탱화(幀畵)
탱화는 고려말 원나라의 지배를 받은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티베트의 ‘탕카(Thang-ka)’가 그 어원이다. 천, 종이 혹은 비단에 그림을 그려 족자 형태로 만들어 거는 불화로 제작의 용이함, 이동이 가능하다는 편리성으로 인해 벽화의 벽면을 대체해 감에 따라 현재 남아있는 고려시대 불화의 대부분이 탱화이다.
탱화는 크게 3가지 유형으로 상단탱화(上壇幀畵), 중단탱화(中壇幀畵), 하단탱화(下壇幀畵)로 구분할 수 있다. 상단은 불보살탱화(佛菩薩幀畵), 중단은 불법수호신의 신중탱화(神衆幀畵)탱화, 하단은 영가천도의 영가단탱화(靈駕壇幀畵)이다. 상단탱화의 불화들은 대체로 불상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금당(金堂)의 정면, 전각의 중앙에 봉안한 불상이나 보살상의 뒷면에 모셔진다. 그리고 중단탱화는 전각의 주불을 모신 불단의 오른쪽과 왼쪽 벽면에 모시는 탱화를 지칭한다. 신중탱화(神衆幀畵)라고도 하며 제석천(帝釋天), 산신(山神)등을 그린 탱화가 이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하단탱화의 하단은 영가단(靈駕壇)이라고도 하며 조상숭배와 연결되어 있는데 조상이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정토신앙(淨土信仰)과 결부된다. 극락왕생을 그린 탱화는 후불탱화(後佛幀畵)로 모셔져야할 것 같지만 대개 하단에 위치한다. 하단탱화는 대체로 불전(佛殿)의 좌우측 벽면에 설치되며 영가(靈駕)의 위패(位牌)나 사진을 봉안한다. 그리고 그 후면에 탱화 거는데 이를 보통 감로탱화(甘露幀畵)라 한다.
3) 사경화(寫經畵)
대부분의 사경(寫經)에는 앞부분에 경전의 내용을 압축해서 묘사한 변상도(變相圖)가 위치하는데 이를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라고 한다. 사경화의 기원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담은 불전도(佛傳圖), 전생(前生)을 묘사한 본생도(本生圖)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대 인도의 여러 불탑(佛塔)과 탑문(塔門) 등에 새겨진 부조상(浮彫像)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사경변상도는 금니와 은니로 정교하게 그렸으므로 회화사(繪畵史)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조성발원기(造成發願記)가 있어 불화양식에 대한 이해와 조성연도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사경화는 본래 불교의 진리를 퍼뜨리기 위해 경전을 필사(筆寫)하는 것이었으나, 인쇄술이 발달한 이후 실용적인 면보다는 경전을 필사함으로써 공덕을 세운다는 신앙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최고급종이인 감지(紺紙)와 같은 색지(色紙)에 금니, 은니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화려한 장식경(裝飾經)으로 발전하게 된다. 현존하는 사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화엄경(華嚴經)』이 있으며 거기에 백지로 된 화엄경 변상도가 나왔다. 사경이 가장 발달한 시대는 고려시대이다. 고려시대는 국가적으로 사경원(寫經院)을 둘 정도로 사경의 제작이 성행하였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인쇄된 판경(板經)으로 대치됨에 따라 판경화(板經畵)가 제작되었다.
4) 괘불(掛佛)
한국 불교회화 중 야외 법회 시 사용하는 대형불화를 통칭하여 괘불(掛佛)이라 한다. 괘불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오직 우리나라와 티베트에서만 유행하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괘불은 전부 조선후기의 것으로 약 100여점이 있으며 이전시기의 괘불은 존재하지 않는다. 괘불 역시 탱화와 마찬가지로 여말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실제로 봉안(奉安)을 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으며, 선초에 들어서야 화룡(畵龍)으로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다는 기록을 통해 괘불과 비슷한 야외법회의 예배대상의 존재와 함께 괘불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괘불의 형식은 독존(獨尊)형식, 삼존(三尊)형식, 군도(群圖)형식으로 나뉘나, 공통적으로 석가모니의 설법 장면을 나타내는 영산회상(靈山會相)을 표현하며, 주불(主佛)을 크게 나타내고 그 외의 등장인물은 작게 해서 화면을 채우는 등의 괘불 특유의 형식을 보인다.
(2) 불화의 양식에 따른 구분
1) 궁정양식
왕공 귀족의 발원과 시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탄력적이고 강인한 묘선이 특징이다. 풍부한 색채와 뛰어난 농담 구사를 통한 입체감, 질감표현이 돋보이는 것으로 문양 묘사에서도 뛰어난 면을 보인다. 동경미술관(東京美術館)의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등은 궁정과 관계 깊은 인물이 발원하여 궁정 소속의 화가들이 제작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으로서 명문(名文)을 화면 좌우측에 기입하였으며 금니에서 보이는 근엄한 서체(書體)가 공통점이다. 이들 작품은 묘선(描線)의 탄력과 강인함, 색채의 풍요함과 높은 명도, 색감에 있어서 뛰어난 농담 구사에 의한 입체감 및 부드러운 질감표현, 그리고 세밀하며 치밀한 문양묘사 등을 통해 고려불화의 특징 중 하나인 궁정양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들 궁정양식은 도화원(圖畵院)이나 화국(畵局)의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짐작 된다.
2) 사원양식
섬약한 묘선, 형식화된 문양과 생경한 색채 표현 등의 특징이 있다. 명문이 있어 사찰과 시주자의 신원은 물론 조성 목적을 확인할 수 있다. 나라 송미사(奈良 松尾侍)의 <아미타팔대보살도>의 금니명에서 볼 수 있듯 승려 등 사원관계자들이 작품제작에 관여한 작례를 보면 묘선은 약간 섬약하게 몰려있는 느낌의 것으로서, 색채표현 또한 생경하며, 공예성 강한 정교함을 지닌 문양 등이 형식화되어 있다. 그렇지만 법은사본(法恩侍本)에 보이는 경묘한 필치 및 중간색을 다용한 화려한 채색법 등 궁정양식과 공통되는 점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풍은 궁정양식에 준거하면서도 결국 그 목표점까지 도달하지 못했던 표현법인데, 이것을 고려불화에 나타난 사원양식이라 부를 수 있다.
3) 민중양식
민중양식은 삼각형의 얼굴과 세밀한 묘사, 화려하고 선명한 채색 등의 특징을 보이며 궁정양식, 사원양식과는 다른 면을 보인다. 일종의 민불화(民佛畵) 형태로 파악되는데, 궁정양식과 사원양식을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 산형 상삼신사(山形 上衫神社)의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에서는 화면 중앙부 아래쪽에 기명란 등을 따로 두지 않고 화면에 직접 묵서했으며, 일반 화공으로 하여금 제작하게 하였던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법은 지금까지 보아온 양식과 다르며 채색과 표현역시 다르므로 이것은 민간 화공에 의해 형성된 작품으로 고려될 수 있으며 고려불화 중의 민중양식을 전하는 작품이다.
(3) 불화의 형식에 따른 구분
고려불화의 보살과 부처들은 고려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여래상의 경우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힘이 느껴지는 사각형의 얼굴과 근엄한 형태,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 가슴의 만(卍)자문 5,6등신의 비례에서 보이는 풍만한 신체구성 등의 특징을 보여준다. 보살 또한 가는 눈썹과 입술, 자비스러운 미소와 같이 풍만한 육체로 그려져 고려 특유의 화풍을 느낄 수 있다.
1) 아미타불화(阿彌陀佛畵)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다스리는 아미타불과 관련한 그림이다. 서방정토는 극락(極樂)이라고도 하며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은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대중적 부처 중 하나이다. 아미타불에 언급한 경전은 『아미타경(阿彌陀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등이 있으며 이를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 한다.
아미타불화는 <관경변상도>, 극락에서 아미타불이 설법하는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 왕생자의 집을 찾아간다는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로 구분된다. 악행을 하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지옥도와 대비되어 선인선과가 강조된 그림이다.
①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줄여서 관경(觀經)이라 하는데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관경변상도라 한다. 관경도 혹은 극락도(極樂圖)로도 불리며, 관무량수경이 아미타극락에 환생하는 방법을 언급한 경전이기에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불화이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가운데 가장 늦게 성립된 것으로 인도 마가다국에서 있었던 왕위찬탈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왕비에게 석가불이 아미타극락을 볼 수 있도록 설교하는 장면을 그린 <관경서분변상도(觀經序分變相圖)>와 왕비가 명상과 염불을 통해 극락을 본 뒤 왕생한 것을 도상화한 <관경16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가 있다. 여말선초에 유행했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변형, 축소되면서 쇠퇴하게 된다.
②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
서방정토에서 무량한 설법을 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그린 것이다. 아미타불이 홀로 그려진 <아미타독존도>, 아미타불과 관음보살(觀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혹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 그려지는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관음·대세지·문수(文殊)·보현보살(普賢菩薩)이 함께 그려지는 <아미타오존도(阿彌陀五尊圖)>와 오존도에 미륵(彌勒)·지장·제장애(除障碍)·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추가되는 구존도(九尊圖)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아미타구존도는 상하구분이 뚜렷한 2단 구조를 보여주는데 상단에 아미타불을 그리고 하단에 보살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지물(指物)을 들고 있다.
③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
아미타불은 왕생자(往生者)가 선행을 쌓고 염불을 행하면 임종 시 구름을 타고 왕생자의 집까지 몸소 마중을 나와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인도한다고 한다. <아미타래영도>는 아미타불과 그 일행이 구름을 타고 왕생자의 집으로 와 서방정토로 데려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염불만 외워도 극락왕생할 수 있지만 9가지의 등급으로 나뉘며 등급에 따라 보살(菩薩), 승려(僧), 속인(俗人) 등으로 묘사된다. 또한 왕생자를 맞을 때도 등급에 따라 달라진다. 아미타설법도와 마찬가지로 독존도, 삼존도등이 있다.
2) 미륵하생경변상도·비로자나삼존도·약사여래불화
고려시대는 아미타불화가 주로 그려졌고 그로 인해 현재 남아있는 불화의 상당수가 아미타불관련 그림이다. 하지만 아미타불외에도 소수의 그림이 전해지는 부처들이 있는데 바로 미륵불(彌勒佛),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약사불(藥師佛)이다. 석가모니불에게 미래에 성불하라는 수기를 받고 56억 7천만 년 후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를 미륵불이라 하며 이것을 그림으로 구현한 것이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이다. <비로자나삼존도(毘盧舍那三尊圖)>는 법신(法神)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문수·보현보살이 협시하는 것으로 현재 쾰른 동아시아 박물관에 남아있다. 약사불은 동방 유리광세계(東方 瑠璃光世界)의 교주로 중생의 병을 치유하고 재난을 없애주는 부처이다. 도상적 특징으로 왼손바닥에 약그릇을 올려놓는 것이 있으며 <약사여래독존도(藥師如來獨尊圖)>와 일광(日光)·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하는 삼존도, 12신장(神將)과 기타 성중(聖衆)을 표현한 <약사불회도(藥師佛會圖)>가 있다.
3) 보살도
①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수월관음도>는 글자 그대로 달이 비친 바다 가운데 금강보석에 앉아있는 관음보살을 그린 것이다. 수월관음은 재난과 질병을 막아주는 관음보살 가운데 하나이다. 보타락가산(補陀落伽山)에 거주하면서 중생을 거주한다고 하며 공상적인 분위기로 묘사된다. <수월관음도>는 보타락가산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의 방문을 받은 관음보살이 설법하는 장면을 형상화 했다. 버드나무가지를 꽂은 정병과 대나무 등의 묘사는 중국을 거치면서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② 지장보살도(地裝菩薩圖)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여 극락으로 인도하는 보살로 지옥계 불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장보살은 브라만교의 지신(地神)에서 유래하였는데 명부의 구세주로 숭앙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 이르러 아미타신앙과 함께 사후신앙(死後信仰)으로서 널리 퍼지게 된다. 일반적인 보살의 경우 귀족과 같이 보관(寶冠)과 같은 화려한 장식을 하지만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맹세를 수행하기 위해 스님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지장보살은 간혹 두건을 쓴 채로 그려진 경우도 있는데 이는 당시 스님들이 두건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보통 한손에 석장(錫杖), 다른 손에는 보주(寶蛛)를 드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편이다. 지장보살도는 단독으로 모셔진 것과 시왕(十王)을 덧붙인 <지장시왕도(地裝十王圖)>등 양식이 다양한 편이며, 현재 남아있는 고려시대 지장보살도는 대부분 일본에 있다.
③ 나한도(羅漢圖)
부처의 수준에는 못 미치나 상당한 도를 깨우쳐 부처의 높은 제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오백나한도>와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가 대표적이며, 고려시대에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를 그린 것으론 황해도 신광사(神光寺) <오백나한도>가 유일하다. 특별히 언급이 된 경전이 없으므로 부처가 돌아가신 후 가르침을 정리하기 위해 모인 오백 명의 비구들로 보는 경우도 있다.
Ⅴ. 고려불화의 색채
1. 고려불화의 색채
(1) 불화의 색채관
불교미술에 있어서는 어떤 색채가 우연한 이유 때문에 또는 순수한 미학적인 이유 때문에 선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즉, 금(金)은 부처의 절대적인 색채를 나타내는 풍요하고 성스러운 장엄의 일부분을 형성하기도 하고 또 그와 동시에 독실한 신자가 부처에게 바치는 선물과 정신적인 장식물의 기능을 한다.
부처의 몸을 금빛으로 칠하는 것을 불광(佛光), 즉 진리와 지혜라는 무한한 빛을 상징하게 되어 머리와 몸이 두광(頭光)과 광배(光背)로 둘러싸이는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고려 이전에는 한 사찰의 주불을 모시는 전각을 흔히 금당(金堂)이라 불렀다. 이것은 금인(金人)을 모시는 집, 또는 금인이 살고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또한 부처의 상의 특징을 보고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금인인데, 불상의 도상은 32상에서 불상은 금빛이 나야 한다고 규정한데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만다라(曼茶羅)의 색채는 원칙상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흑(黑)의 오색이다. 현교(顯敎)에서는 흑색을 빼고 사본근색이라 하나 밀교에서는 오정색이라고 하여 오색을 중요시하고 있다. 밀교에서 색채를 중요시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첫째, 자기를 무화하여 절대자에게 귀의하는 신앙형태라고 하기보다는 인간 세계의 생생한 감각을 긍정하고 이를 유효하게 활용함으로써 성속일체(聖俗一體)의 체험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둘째, 밀교는 색체에 상징적 의미를 내포시켜 그것을 상징으로서 감각을 통하여 직관적으로 파악하려 함에 있다. 불교는 생명 있는 총 천연색의 세계이며 그 세계를 상징적으로 5색에 의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만다라, 즉 불화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원래의 밀교에서 뜻하는 색채의 상징적 의미는 불교가 여러 나라로 전파되면서 각 나라나 민족의 특수성에 맞게 변모되어 갔다.
불화의 채색은 오채로부터 시작하였다. 오채는 음양오행 사상에 기본을 두고 있다. 음양은 일월성신의 운행과 자연현상을 인간 생활에 연관시켰고 우주 본원인 태일(太一)의 세계에는 음양의 두 기가 있다하여, 천지만물의 화성은 이 두 기의 소장(消長)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태일 음양의 철학이 수학으로 전개된 것이 역학이론이며 천문학적인 방면으로 발전한 것이 음양오행 사상이다.
오행은 색채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금ㆍ목ㆍ수ㆍ화ㆍ토의 5원소는 각각 백ㆍ청ㆍ흑ㆍ적황으로 상징되고 계절과 방위도 색깔로 표현되었다. 5원소는 금생수,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과 같이 상생(相生) 순환하여 천지 만물을 형성한다고 한다. 곧 백ㆍ청ㆍ흑ㆍ적ㆍ황의 오색과 중간색을 음양에 따라 배색하면 단청의 색채가 된다고 하였고 이것이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로 보는 것이다.
이 관계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오행절기방위색상신상목(木)춘(春)동(東)청(靑)좌청룡(左靑龍)화(火)하(夏)남(南)적(赤)전(前)주작(朱雀)토(土)토용(土用)중앙(中央)황(黃)중인(中人)황(黃)금(金)추(秋)서(西)백(白)우백호(右白虎)수(水)동(冬)북(北)흑(黑)후(後)현무(玄武)
이렇듯 오행은 천문 지리의 사상을 구현하여 방위, 절기 등이 있으며 색상을 이에 부합시킨 것이다. 이 음양오행설을 기조로 한 청ㆍ백ㆍ황ㆍ적ㆍ흑은 우리민족의 민간사상에도 깊숙이 파고들었고 특히 우리 조상들은 의식 구조상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색의 사용을 밑에는 청ㆍ자ㆍ록ㆍ남색인 청색 계열로, 위에는 적ㆍ주홍색인 적색 계열로 대별하여 사용하였다.
오방색 사용의 대표적인 예로는 고려 불화와 궁궐에서 사용했던 단청을 들 수 있는데, 이 오방색은 위에서도 거론했듯이 다섯 가지 색상이 방위와 위치에 따라 완벽한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되어 나타난다. 천장(天障)은 천상(天上)의 세계를 나타내기 때문에 천계의 신격이 표현되도록 하고, 천장을 떠받드는 부재는 오색구름과 무지개가 그려져 있으며, 기둥에서는 구름처럼 너울이 드리워져있고 기둥 아래에는 현세의 존엄성을 푸른색과 붉은 색의 단조로움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단청은 무늬마다 그 뜻이 내재되어 있는데 박쥐문은 복과 자손번창의 의미를 담고 있고, 연화문은 불교에서 대자대비와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것이다. 생활에서의 표현으로는 색동저고리가 그 예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건강과 화평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서민들도 아기의 돌과 명절 및 혼례 때에는 색동옷을 입었다. 색동에 주로 사용되어진 색은, 적 ․ 청 ․ 황 ․ 백의 4가지 정색(正色)이었으며,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간색(間色)이 첨가되어지기도 한다. 색동은 또한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무당의 옷으로도 이용되었는데, 오방색은 상징의미로 무당의 주술적 능력을 가시화 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고려불화에 사용된 색채는 오행설을 기조로 한 종교적 상징을 지니고 있다. 이 오색은 차츰 동양의 전통적인 우주철학인 오행설과 결합되었고, 우리 민족의 색채적 이론을 성립하게 되었다.
(2) 고려불화의 색채특징
지금 남아 전해져 내려오는 고려시대 불화는 후기 즉, 12세기 말에서 고려 말까지의 그림이 대부분이며 그림에는 채색화가 주류를 이루고, 선적 요소는 퇴화되어 채색을 보완해 주는 입장으로 변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로써 고려 불화를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색채의 화려함과 정교함이라 할 수 있겠다.
고려 불화 색채에서 보면 당화계(唐畵係)와 남송계(南宋系)라 하는 두 가지 흐름이 있어 전자는 유매한 색채의 것이며, 후자는 중간색을 많이 사용한 밝은 채색이 행해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고려 불화의 색채는 밝고 은은한 색조가 전면적으로 묘사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찬란한 금색이 조화되어 화려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금니의 사용은 빛의 각도와 광도에 따라, 다시 말해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 또는 움직임에 따라 변하며 각 시각마다 빛의 반사도 달라지므로 화면은 고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화면이 끊임없이 변함으로써 신비스러움과 색채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상징적인 색채를 표현하고 있는 고려 불화는 주, 녹청, 군청의 삼색을 기본으로 하여 채색을 매우 절제하고 있으며, 단조로운 채색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고려 불화의 묘사에 있어서는 붉은 색은 주로 주(朱)나 금색으로 많이 쓰였고, 그 위에 흰색의 투명한 사라(紗羅)가 어울린 관음상의 호화스러움은 고려 불화의 화려함을 한층 더해주고 있다. 암녹색과 짙은 갈색위로 붉은 색의 옷을 늘어뜨린 아미타불이나 붉은색 위로 흑색이 감도는 짙은 색의 가사(袈裟)를 걸친 지장보살의 옷은 장엄한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색채들의 장식적 기능을 위해 함께 많이 쓰인 금색은 부처의 절대적 색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고려불화는 교리내용에 바탕을 두어 내용은 신행적(信行的)으로 압축하여 일정한 의궤(儀軌) 내용을 지니고 있다. 색채의 사용 역시 외적인 색감보다 내재된 상징성이 중요시됨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즉, 불화에서의 색채는 민간신앙과 음양오행과 민속적인 것까지 아울러 지니고 있어, 고려시대 귀족적 취향이 강했고 이러한 성격은 곧 회화에도 반영되어 불화의 상징적 색채와 결합된 독특한 색채적인 특징을 띄게 된다. 이러한 불화의 특징을 세 가지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색채의 배합을 통해 느껴지는 보색대비의 조화이다. 이러한 상반된 조화는 음양과 오행에서 나온다. 이 5채(五彩)의 실시에는 반드시 주색이 있고 어느 한색이 주색이 되면 그 색에 부합되는 다른 색이 나온다. 또 대비의 색채가 주는 선명한 효과인데 적색과 녹색의 대비, 녹색과 흰색의 대비는 화면을 시각적으로 종교적인 엄숙함과 함께 화려함을 느끼게 한다.
덕천여명(德川黎明) 소장 <아미타구존래영도(阿彌陀九尊來迎圖)>에서 뚜렷이 그 성격을 찾아볼 수 있는데, 경쾌한 흰사라를 쓴 관음보살과 U자형 천의 가락이 무겁고 번잡스럽게 표현된 대세지보살 등의 예에서 보다시피 풍만하고 의젓한 형태, 흰색과 붉은색과 갈색의 현란한 색채대비, 화려한 장신구등속에 잘 나타나 있다.
두 번째로는, 고려불화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귀족적 취향이다. 이때의 색채는 붉은색과 금색이 주조를 이루었으며, 그 위에 흰색의 사라가 어울린 관음상은 더할 수 없을 정도의 화사함이 베어난다. 뿐만 아니라 암녹색과 짙은 갈색위로 붉은색의 옷을 늘어뜨린 아미타불이나 반대로 붉은색 위로 검정의 빛이 감도는 짙은색 웃옷을 걸친 지장보살의 옷은 장엄한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일본 대덕사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바위에 비스듬이 걸터앉은 풍만한 자태나 인자해 보이는 표정 등 높은 신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관음의 옷은 왕족 내지는 귀족의 옷으로 상의 황색은 왕족과 같음을 의미하며 하의 붉은색 역시 아주 귀한 신분임을 나타내고 있어 귀족적인 취향을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위의 홍산호나 백산호 역시 정토임을 의미하기 위한 소품들로 삼작 노리개에 홍산호를 달아 귀족 부인네들의 장식물로 애용한 경우를 미루어 볼 때 그들의 귀족취향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세 번째로는, 고려 불화에서 보이는 독특한 기법인 금니를 이용한 육신의 표현방법이다. 특히 1310~23년경의 <수월관음도>가 모두 금색이고, 아미타불화에서는 1320~1350년 사이에 금니가 많이 나타나며, 1350년경 <미인하생경변상도(彌靭下生經變相圖)>에도 금채가 보인다. 이 작품이 전반적으로 녹색을 칠한 부분이 많아서 화면이 밝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찬란한 금색 피부의 표현으로 고려불화의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한편 피부색을 그대로 표현한 경우에는 금색으로 된 것에 비해 보다 입체적인 표현 기법을 사용하는데, 이마에서 광대뼈 안골 주변과 턱, 삼도어깨 부분과 가슴, 손, 발 등에는 윤곽선에 접해서 유기질의 적색으로 엷은 훈담(暈淡) 처리를 하고 있는데, 이 적색의 훈담처리는 피부의 밝은 담홍색과 겹쳐져 적비색을 띠며 육신에 희미한 명암을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육신의 먹선에 접해서 피부색을 칠했기 때문에 먹선이 희미하게 흐려져 미묘한 피부의 질감과 굴곡을 표출한다.
눈의 묘사에 있어서는 섬세한 기법이 행해졌는데, 상하의 눈꺼풀의 경우 가는 먹선으로 표현하였고 윗꺼풀의 경우에는 먹선을 짙게 하였으며, 그 아래에 녹청색의 선을 첨가하여 눈에 우아함을 주고 있다. 또 흰자위는 여백으로 검은 부분은 연지에 흑색을 섞은 갈색을 칠하고 동자는 농흑으로 찍었다. 입술의 경우 연지로 칠해졌는데, 이러한 눈이나 입가에 보이는 치밀한 묘사는 머리털이 난 이마 언저리, 눈썹, 귀 털, 속눈썹까지도 한가닥, 한가닥 먹선으로 치밀하게 양식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육신부(肉身部)에는 배채를 사용하여 은은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으며, 때로는 배채에 금니를 사용하는데 이는 비단 바탕을 보호하고 채색의 탈락을 방지하려 했던 것이다.
의습선을 보면 육신의 선과 마찬가지로 먹선을 먼저 그리고 의습선에 접해서 연지를 훈담하여 상의 부드러운 질감을 표현했다. 이것은 상에 싸여진 육신부의 부드러운 양감을 느끼게 하고 오른발의 종아리와 왼발의 무릎사이에 생긴 약간의 공간에는 농묵의 그림자를 그려서 상과 육신, 상과 상의 구별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Ⅵ. 고려불화가 회화에 미친 영향
1. 고려불화와 일반회화의 관계
우리나라 회화사에 있어 불교 회화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던 때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시대이며 그 중에서도 작품이 남아있는 13~14세기의 고려 후기 작품이 중요하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고려불화는 200점을 넘지 않으며, 그 시대의 일반 회화는 더욱 그 수가 적다 하겠다. 그래서 성격은 비록 다르지만 고려 불화의 자체인 종교적 부분으로서의 의미를 넘어 자료가 부족한 고려의 일반 회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불화가 고려 시대 후기 약 한 세기 반에 걸친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 작품이기는 하나 고려 전 시대의 사회, 종교, 문화 상황을 짐작케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며 불화 안에 내포되어 있는 양식적 특성들은 고려 전후(前後)시대 그리고 다른 나라의 것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이들 일반 회화와 관련이 있는 요소들이 불화의 표현 안에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일반 회화의 다양한 양상을 보완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인물(人物), 산수(山水), 영모와 화조(花鳥), 송(松)․죽화(竹畵), 계화(界畵)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 구도와 구성, 설채법(設彩法), 필묵법(筆墨法) 등의 기법에서도 독특한 측면을 갖고 있다. 또한 불화는 당시의 일반 회화와 별다른 차이가 드러나지 않아 종교적 의미를 넘어 우리나라 회화사에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고려 불화를 단순히 종교적 측면의 작품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 의미로서 그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인물화
불교 회화에 묘사된 불․보살상들은 물론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일반 인물의 모습과는 다른 특징들을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불화 속의 인물화를 일반 인물화와 비교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하겠으나 불․보살의 경우 그 모습이 비록 일반인과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묘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그 당시 인물화법이 곁들어져 있으므로 고찰의 필요성이 있다 하겠다.
고려 불화에 보이는 불․보살의 안면(顔面) 중 정면관의 경우 대부분이 둥근 얼굴과 넓은 이마, 가늘고 긴 눈썹과 아담한 코, 작은 입, 두터운 턱, 큰 귀와 두툼한 귓 볼, 짧은 목 등이 특징을 이루는데 그 중에서도 눈은 생기에 찬 듯 보여 마치 살아 있는 듯 기운생동의 느낌을 받게 한다. 이러한 표현을 보면 이 시대의 화사(畵師)들이 기(氣)에 대한 이해와 점정(点睛)에 대한 기량을 늘 갖추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홍조가 감도는 얼굴과 작은 입술은 붉어서 귀티를 더해 주며 측면관의 경우 얼굴이 대단히 살쪄 보이고 볼이 매우 두터워 둔중한 느낌을 더한다. 이러한 표현 특징은 중모(重模)된 <이색상(李穡像)> 등 고려 시대 인물의 초상화에서도 엿보이며 의습에 있어서의 묘사 등에도 철선묘(鐵線描)가 기조를 이루어 필선(筆線)이 힘차고 생동하는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는 당시 일반 사대부 초상화와 고려 불화 사이의 시대 양식의 공유 정도를 느낄 수 있다.
(2) 산수화
고려 불화에는 때때로 <십왕도(十王圖)> 등의 배경에 산수화가 그려진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완전한 산수화가 표현된 경우는 극히 드물며 배경에 암석, 수파(水波), 수지(樹枝) 등 산수화적 요소들이 비교적 자주 보여 이것을 통해 불교 회화에 수용된 산수화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불화 속 산수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흑칠금니소병(黑漆金泥小屛)>의 한 면인 <자장보살도>의 배경에 묘사된 태조배점(太祖拜岾) 장면 주변의 산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금강산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어 일종의 실경으로서 주목된다. 노영(魯英)이 1307년에 그려 넣은 이 금강산의 모습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뽀족뽀족한 암산들의 모습이 후대의 금강산도에 보이는 첨봉(尖峰)들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려 불화의 배경에 나타나는 암석의 표현 중 수월관음도 등의 작품을 보면 청록산수(靑綠山水) 또는 금벽(金碧)산수의 전통을 보여주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청색과 금색이 화려한 바위로 그 모습이 단순한 바위라기보다는 벽옥귀(碧玉鬼)와도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는 표면에 전혀 준법이 가해지지 않고 전통을 고수하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산수적 요소의 예를 바탕으로 불화와 일반 회화간의 깊은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영모 화조화
고려 불화에는 동물과 새의 경우는 그림이 그려진 경우가 많지 않지만 꽃과 연꽃의 경우는 그 예가 많아 일반 회화와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다. 우선 조류의 경우를 보면 일본 지은원(知恩院)과 서복사(西福社)에 소장된 <관경변상도>가 주목되어지는데 이 <관경변상도>에는 연못에서 노니는 단학(丹鶴)과 공작이 그려져 있으며 <수월관음도>의 왼편 상단에는 꽃가지를 입에 문 함화청조(含花靑鳥)가 표현되어 있어 한결같이 정확함과 정교함을 보이며 기운생동하는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 불교 회화에 연꽃이 가장 빈번하게 표현되어지는데 그 표현 방법에 있어 세밀함과 정교한 묘선으로 그리고 있어 더없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장식적인 요소를 보여준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새와 꽃을 그리는 화조화의 경우는 유존 작품이 거의 없어 고려의 일반회화의 귀중한 자료가 되며, 지극히 섬세한 윤곽선으로 모양을 그린 수 아름다운 채색을 더하는 쌍구진채법(雙鉤眞彩法)이 꽃 그림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음을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4) 송죽화
고려시대에는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송(松), 죽(竹), 매(梅)가 종종 그려졌는데, 이 중 매화의 경우는 불교 회화에 있어서 그 표현된 예가 알려지지 않고 나머지 송, 죽만이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하겠다.
일본 경신사(鏡神寺) 소장의 <수월관음도>와 <나한도>를 보면 암괴 표현에 있어 곽희파 화풍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이미 고려 후기에 제법 곽희파 화풍의 수용이 폭넓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대나무 그림은 <수월관음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수월관음의 배경에 대나무가 두 그루 서 있는 것을 표현하기도 했고, 옆에 놓이는 정병에 댓가지가 꽂혀 있는 형태로 묘사되어져 있기도 하다. 청정(淸淨)을 나타내는 이러한 대나무들은 한결같이 먹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푸른색을 채색한 쌍구진채법으로 표현되어져 전통성을 강하게 보여주는데, 이는 북송대의 문동(文童)이나 소식(蘇拭) 등의 호주죽파(胡州竹派)와는 다른 묵죽화의 표현을 보인다. 또한 이런 대나무 그림들은 고려후기의 문인 화가들이나 선승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일반 묵죽화와도 현저하게 차이를 들어내고 있다.
(5) 계화
고려불화에서는 고려 시대 왕궁의 건물이나 실내장식들을 알아 볼 수 있기에 더욱 값지게 생각되어지는데, 나는 듯한 단정한 곡선미와 푸른 지붕, 그리고 붉은 단청, 금장식으로 장식된 난간, 잘 가꾸어진 정원과 연못 등이 어우러져 건축미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기왓골은 가는 곡선과 진먹선으로 표현되어지며, 섬세한 금선을 사용하여 그려진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선들은 대단히 숙달되고 능숙한 기량을 보이는 표현이라 하겠다.
이런 계화들의 표현은 다소 실제의 모습 이상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왕실 건축의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려 시대에 있어서의 건축사 연구에서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으며 계화들 역시 다른 주제의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하고 정교하며 귀족적 아취를 물씬 풍기는 고려 불화의 특성을 돋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겠다.
2. 한국 채색화에 미친 영향
색은 어느 민족이나 사용하고 있으며 민족마다 색의 상징 표현이나 그 사용 의미가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색채에 대한 변화, 발달은 미술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구려의 고분 벽화, 고려의 불화 그리고 조선 시대의 민화로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오방색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현대 채색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려시대 불화는 단순히 종교적 의미나 미감(美感)의 수준을 넘어 궁중 취미 또는 귀족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서 세심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움과 호화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밝고 화려함을 바탕으로 하는 고려 불화의 양식이나 색채적 표현에 있어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인다. 화려함과 섬세함, 그리고 날카로움 속에서 배어나오는 부드러움은 독특한 개성을 지니며 밀교에 의한 원색적 채색을 바탕으로 화려하고 한정된 색, 즉 오방색과 금니에 의한 섬세한 그림들을 선보인다.
색채적 표현은 음양오행적 사고에 입각한 오색이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우리나라만의 독자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훗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에 있어 일관되게 나타나며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듯한 소박미의 경향성을 담고 있다. 이런 한국적 미의특성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채색화의 근간을 이룬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불화가 아닌 민중 미술로서 그 변모를 꾀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서는 민화를 들 수 있다. 민화는 색채 표현에 있어 극채색을 사용하여 시각적 효과를 높여준 것으로 이는 고려 불화에 쓰여진 기법 등이 전수되어 표현화된 것이라 본다.
이렇듯 고려 불화에 있어서 색채 표현의 특수성은 표현의 방법인 구성과 구도, 필묵법 등의 표현에 비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 채색화 발달에 있어서도 그 중요성은 크다 하겠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불화적 색채관은 민화를 통해 그 특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오방색 중심의 색채를 바탕으로 색상의 폭이 넓어지고 주제가 다양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민화 중 진채화로서의 대표적 작품은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로 강력한 색상 대비와 화려함,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특성을 지닌다. 특히 태양과 소나무의 붉은 색과 파도와 낙수(落水)의 흑백 대비는 자연의 웅장함과 유기적 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 색상의 밝음은 시각적 화려함과 장식적 아름다움 그리고 유교적 이념의 종교관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민화는 음양오행 사상에 근거한 강한 원색을 바탕으로 현세기복을 바라는 주술적 신앙의 의미와 민중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화려한 색채의 장식성 그리고 순박한 정서가 내포되어 다양한 소재로 표현되어져 왔다. 이러한 오방색적 특징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의 채색화 작업에도 도입하여 표현되어져 왔는데, 그 대표적 예로 박생광의 작품을 논할 수 있다.
박생광의 작품을 보면 불교가 정신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주제나 색채적 표현에서 느낄 수 있다. 특히 고려 불화에서 볼 수 있던 오방색 중심의 색채는 화려하면서도 기교를 부리지 않은 모습 속에서 작가의 소박함과 전통적 기법이 드러난다. 그의 작품 <무녀>를 보면 압도당하는 듯한 거대한 크기와 원색적인 오방색 표현으로 단청이나 탱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의 작품 대부분에서 이런 불교적 요소의 색채를 느낄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고려 불화에 대한 색채관이며 전통적인 한국인의 색채적 표현인 것이다.
이렇듯 훗날 작품을 통해 우리는 쉽게 한국적 채색화가 불화의 색채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Ⅶ. 결론
고려 시대 미술은 인도와 중국 송의 양식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독창적 세계를 재창출하여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그 양식적 특성이 부각되어지며, 시기적으로 일반 회화 양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상황이기에 미술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그리고 고려 불화는 국가의 보호와 귀족들의 관심속에서 그 영향력을 더해가며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색채의 사용에는 주, 녹청, 군청의 삼색을 기조색으로 중후하면서도 단순한 색채적 표현을 나타내며, 금색의 사용으로 화려함과 호화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유려한 묘선의 사용은 세밀함을 표현하고 다양한 문양으로 변화를 나타내어 아름다움과 전체적인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의 바탕에는 불교 사상인 정토사상과 밀교가 배경을 이루고 있는데, 정토사상은 고려불화의 공간성과 정제성에 영향을 미쳤고, 재래 신앙을 수용한 밀교는 불화 제작의 요구를 확산시켰으며, 원색적 채색을 사용하여 화려함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를 마련한다. 또 다른 양식적 특징으로는 섬세하고 다양한 문양, 철선묘(鐵線描)와 곡선미의 유려함이 세밀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되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고려 불화는 양식에 있어 뛰어난 감각과 독창성을 나타내는데, 이보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색채라 하겠다. 고려 불화의 색채 표현은 오방색이 중심을 이루며 그 위에 금니로 선묘하여 복층적 묘사를 통한 심오한 정신 세계를 표출해 내고 있다.
이러한 불화적 색채관은 훗날 조선 시대에 이르러 민중 미술인 민화로서 표현되어지는데, 극히 서민적이고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된 원색적 색채와 고려의 기법적 요소가 전수되어 화려하고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현대 한국 채색화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고려 불화가 갖는 의미는 단지 회화사에 있어 채색화의 아름다움을 표현, 발전시켰다는 가치적 요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색채를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근간으로 있었고, 큰 영향을 주었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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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성복(sungbok.com), 곽현우 외 6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