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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 시간에 전스틴이 건네준 책을 읽고 있었다. 박노자가 쓴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노르웨이와 한국에 대한 사회구조적 비교분석이 초반부를 이루고 있는 책이었다. 후반부에 좌, 우파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져 있는데, 오랜만에 지적 갈증을 채워가며 즐겁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이전에도 현대사 수업 시간에 그의 논문을 일정 부분 잉용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의 글이 왠지모르게 친숙했고, 성매매 부분이나 좌, 우의 시각 또는 그 모두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려 노력하는 그의 글에 감탄하고 있었다.
11시 쯤이었나, 당직이었던 정훈장교가 사지방(연등장소)으로 들어왔다. 조는 사람들을 깨우고 향학열(?)을 다독이던 그는 갑자기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87년생의 초임장교이니만큼 당직근무를 서도 대충 서지는 않는구나 하며 몇마디 나누는데, 갑자기 내 책 제목을 보더니 갸우뚱 거리며 목차를 좀 보게 해달란다. 목차에 쓰여진 좌파적인 색채의 표제어(맥락 자체가 좌편향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와 양심적 병역 거부에 당황한 그는 불온문서니 뭐니 하며 나를 사상범으로 몰려고 했다. 그보다 나이도 많고 군복무도 훨씬 오래 한 나는, 굳이 그 앞에서 사상적인 논박을 벌이며 군법에 저촉되고 싶지 않았다. 말재주가 딱히 좋은 것도 아닐 뿐더러, 그 역시 '좌' 는 무조건 안된다는 군간부의 말단, 왜곡된 우익의 군 내 전도사인 '정훈장교' 가 아니겠는가. 그는 책상에 놓여있던 중국사 책이나 보라며 기어이 그 책을 가져가겠다며 떼를 썼다.
책장에 읽으라고 비치시켜놓아 읽게 해놓고는 이제 겨우 186페이지 읽었는데 읽던 책을 기어이 빼앗아 가겠다는 그의 사상적 올곧음이 참 짜증스러웠지만 그는 간부였고, 나는 이제와서 불순분자로 몰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읽던 건 좀 마저 읽자는 단순한 나의 욕구와 이제라도 그만 읽게 해야한다는 그의 욕구가, 책의 이쪽 귀퉁이는 내 손, 저쪽 귀퉁이는 그의 손에 붙들린 이 박노자의 책처럼 팽팽히 대립했다. 결국 난 '왜 읽는 책을 가져가냐' 고 툴툴거리며 끝내 책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책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견해를 피력해봤자 난 이미 3/4 가까이 군생활을 해버린 군인이고, 사상에 이리저리 경도되고 휘말릴 정도로 자각 없는 사람은 아니다. 불온문서는 더더욱 아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의 견해는 이렇구나' 하고 인정할 정도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책의 내용의 옳고그름, 맞고틀림과 관계없이 내 군생활은 이미 끝을 향해 가고 있기에 이제와서 그 책을 근거로 달라질 리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조용한 연등 시간에, 상급자인 그 앞에서 부족한 말빨로 그를 감히 설득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나는, 가급적 그의 유도심문을 피해갔고, 책을 털리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연등은 1시간이나 더 남았는데.. 한참 잘 읽던 책을 못 읽게 되자, 읽다만 그 책에 대한 독서욕구만 더욱 강렬해져 갔고, 나는 결국 연등을 그만두고 자리를 떠나 생활관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 3대대의 병영문고에는 읽을만한 책들의 상당수는 통제되어 사라지고, 별볼일없는 자기계발서나 색깔없는 소설류나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에라이.. 전역할 때까진 나도 이젠 소설책이나 읽을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