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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
마지막 편지가 될 지도 몰라. 집주소로 보내줘도 답장은 성실히 할 것임. 군인에서 민간인이 되더라도 펜 끝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움직임일 것이기에. 내게 부친 8번째 편지이자 이번에도 5장이나 되는 장문의 글을 받으며, 내가 네게 이렇게 과분한 정성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잠시 고민했어. 말년에 다다른 지금까지 편지를 보내오는 군인들이 흔치 않음을 잘 아는 나이기에 네 편지가 더욱 소중하단다.
네 말대로 휴가는 전부 휴지가 되고 말았어. 후일을 기약할 수 없을 만큼 전역이 다가와 버리는 바람에 말이지. 그래서 요즘은 휴가 생각 대신 꿈을 그리고 상상하고 계획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 최근 취사장은 독감에 안전사고 발생으로 본의아니게 인력난에 시달리게 되어 다시 내가 전면으로 나서서 통제하는, 거꾸로 가는 군생활을 하고 있다만. 워낙 일복이 터진 나인지라 한편으론 일하는게 더 편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유종의 미가 중요함을 알기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좀 더 일하고 대화하면서 '그래도 꽤 쓸만한 분대장이었다' 는 평가 속에 명예롭게 전역하고픈, 자청해서 피곤한 말년이야.
병장 2개월에 분대장을 달면서 다시 워커홀릭으로 복귀하길 강요받은 내 케이스는 사실 좀 서글픈, 속된 말로 '군생활 꼬였다' 고들 하지. 그래도 나름대로 다시 보람도 느끼고 있고, 시간 가는 속도도 다시 빨라지고 있으니,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 업무 인수인계를 마친다면, 난 내 군생활 앞에 당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분대장을 달면서 모든 관리과 간부 브릿지 역할을 전부 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후임들보다는 육체적으로 편하고, 일도 실질 조리보다는 관리, 유지, 보수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분명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물일병, 이말, 신병 3명이 전적으로 나를 믿고 신뢰하고 있다는 점은 내가 쉽게 '말년의 권리(?)' 에 빠져들다가도 다시 돌아오게 하는 자극제가 되고 있어. 무엇보다도 분대장으로서 의사결정권자로 기능하고, 리더쉽이 필요한 자리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말년만의 진정한 자유는 상당 부분 반납해야 하고. 후임들과, 간부들과 대화의 통로를 모두 열어두어야 하지. 차라리 어정쩡한 부분대장 상병 시절보다 확고한 분대장 타이틀 답게 보람도 맛보고 있으니.. (말도 안되는 자랑질은 이쯤 해둘게)
나 또한 너처럼 치열한 고뇌가 없었다면 나란 존재는 삶의 이유를 잃어버리고 말거야. 그렇게 우린 치열함 속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왔어. '짬' 에선 이미 최고점을 지나 하산하고 있는 말년의 입장에서는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짬 쟁탈전을 관조할 수 있게 되는데, 나보다 윗사람은 간부뿐이니까 그렇다 쳐도, 체질상 관료집단 따위의 상하구조를 배격해 온 나로서는 3인칭 시점과 같은 지금이 좀 더 객관적인 시야를 제공받는 듯해 좋다.
군대의 불합리성을 경험해본 나로서는 사실 배운대로 써먹는다고 모아둔 그 부정적 학습을 되풀이 할 수도 있었는데, 성격상 손쉽게 그 방법을 포기하고 취사장을 3대대 유일의 자유로운 분대로 정착시켰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물론 위계질서가 무너지는 문제로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받은 부정적인 것들을 대물림하지 않았던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사학과에서도 군대에서도 탈권위주의가 좋았던 나는 또 사회에 나가서도 일련의 위계질서들과 싸워나가겠지만, 이런 내 인간관계 철학을 후회해 본 적은 없었어.
(중략) 네 말대로 전역 후 구입할 것들, 미래 계획 등을 열심히 생각해고 게획해 본 결과 군대에서 할 수 있는건 상상 뿐이라는 것도 깨달았지. 그래서 난 그 상상이 증발하기 전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다 기록했어. 일기부터 보고싶은 영화, 드라마, 책, 음악, 사고싶은 것들, 해야할 것들, 학업계획 등등.. 저번 휴가 때 전부 집에 실어다 놓았는데 어찌나 많은지 감히 워드로 입력할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더라고. 그간 끄적이면서 그것들을 이룬 마냥 행복한 상상을 하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공부를 미룬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단다.
중대 왕고가 된 시점부터 난 오히려 내가 할 일을 적당히 찾아서 하고 있고, 분대원들 업무 지원이랑 행정반에서 내려오는 자잘한 일들을 전부 책임지고 있어. 그동안 실세 팀원으로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 진짜 팀장이 된거지. 후임들이 본연의 조리 업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내가 그 외 지원업무를 해주는 것이 분대원들을 위한 일이라면, 한달 간 유종의 미를 몰아 거두는 마지막 스퍼트라면, 분명 할만한 일인 것 같다. 어쩌면 이게 가장 이상적인 말년의 모습인지도 몰라.
스트레스와 자부심, 그리고 말년스런 귀찮음이 공존하는 기분을 떨칠 수는 없지만 오늘도 시간은 흘러간다. 어느덧 남은 군생활도 이제는 그냥 죽이는 시간이 아니라, 사회로 던져지는 순간을 준비하는 그것이 되어버렸어. 그렇게 생각하니 잠을 줄여 깨어있는 지금 이 연등시간 마저 소중하게 느껴진다. 어쨌든 난 전형적인 말년으로 가려던 길에서 비켜가기 시작한 듯하다. 어쩌면 지금이 내가 지금껏 해온 군생활 중 가장 유의미한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