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는 매일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타고 내린다. 아주머니, 아저씨, 학생, 어린이, 외국인까지.. 매일 무심히 지나치지만 조금만 유심히 관찰한다면 새로운 인간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 범주는 지하철이 뻗는 공간만큼이나 넓으니, 가히 인간 전시장이라고 할 만하다. 헐렁한 전동차 칸의 좌석 서너칸을 차지한 채 다리 사이로 양 손을 집어넣고 웅크려 잠든 만취객, 매일 무언가를 열심히 팔고 있는 보따리 상인 아저씨, 조그마한 액정 화면으로 무언가를 시청하고 있는 젊은 청년, 비좁은 공간에서도 똘망똘망 씩씩하기만 한 꼬마아이, 핸드폰을 분주히 매만지고 있는 엄지족 여학생, 노약자석에서 도란도란 환담을 나누시는 어르신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다 모인 이곳 지하철에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쉽게 길을 묻는 용기가 생기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학생, 시청역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는지 아는가?’ 주변머리 없기로 소문난 나도 길을 묻는 사람에게는 대충 ‘몰라요’ 하고 지나칠 수 없는 따뜻한 호의를 엿보게 된다. 길을 묻는 아주머니, 할머니, 아저씨들은 그렇게 나의 반가운 말동무가 된다. 힘들게 이성을 소개받아 나간 자리에서 화제도 제대로 끄집어내지 못해 그저 쩔쩔매기만 하던 나의 식은땀이 무안할 만큼, 단지 ‘길’ 이라는 찰나의 관심사는 타인과 나를 한순간에 ‘우리’ 로 만들곤 했다. 하지만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높이고, 자신의 생각이 깊어질수록, ‘우리’ 는 다시 1인칭 단수 ‘나’ 가 되어 주변의 따뜻함에 무감각해지고, 본시 내재되어 있던 인간애의 발현도 무뎌지고 만다. 지하철은 무심하고 서로 단절된 채 각자 갈 길을 가는 냉랭한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상 주변을 돌아보면 놀랍게도 소소한 따뜻함이 가득한 곳이다. 이는 마치, 만원인 엘리베이터에서 각자의 시선을 각각 다른 곳에 고정하고 내릴 것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아주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의 까르륵 웃음소리에 한순간에 밝아지고 하하 호호 웃음이 번지는 것과 같다.

2호선을 거의 반바퀴 돌아가야 하는 피곤한 대학 신입생 시절, 1교시에 늦지 않기 위해 늘 서둘러야 했던 이른 새벽, 어렵사리 자리에 앉아 책을 꺼내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내 쪽으로 고개를 떨구는 옆 사람. 그 사람이 남자면 슬그머니 빼거나 밀쳐내고, 여자면 어깨에 힘을 빼지도 못한 채 괜히 두근두근 거렸던, 뭣 모르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언제 그대에게 그대를 위한 어깨를 빌려주겠는가. 새벽 아침 공기를 가르며 매일 숨가쁘게 달려 탑승한 지하철, 운 좋게 좌석에 앉으면 아래부터 서서히 따뜻해 오는 온기는 나의 긴장을 서서히 녹였고, 그때는 왠지 고개에 힘이 빠진 옆 사람을 동정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대학 첫 중간고사를 치르고 난 늦봄부터는 종종 나도 모르게 옆 사람에게 고개를 의탁하곤 했으니 말이다. 옆 사람이 잠에 취해 내게 고개를 부딪을 때, 갈 길이 멀거든 기꺼이 자신의 어깨를 빌려줄 일이다. 단, 남녀 차별하지 말고 말이다.

서민적인 것은 따뜻함이다. 자가용 같은 독립적인 이동 수단은 편리한 만큼이나, 사람과 사람끼리 부대끼는 따뜻함을 잊고 살게 한다. 고개를 돌려 세상을 바라보면, 모두들 사람 속에 파뭍히듯 살아가지만 결코 절대적인 고독함을 떨쳐낼 수 없는 인간 군상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다소 비약이라는 것은 알지만, 지하철은 그렇기에 아직 서민적인 낭만이 있다. 그 낭만이 있기에,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행선지를 향해 가면서도 작은 이야기들을 품고 추억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든 쉽게 교통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하고도 접근성 높은 우리네 지하철은 삭막한 도심의 따뜻한 낭만열차다. 오늘 만큼은 이동하면서 으레 귀에 꼽았던 이어폰을 뽑고, 길을 몰라 두리번거리는 행인에게 먼저 말을 걸어 보라. 도움을 받은 상대방의 웃음이 내 입가를 미소짓게 만들고, 나의 미소가 곧 세상을 따뜻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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