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 홍래는 막차를 놓쳐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 훤칠하고 서글서글하니 잘 컸다며 울 어머니의 칭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간 성복닷컴 정모를 핑계로 뭉뚱그려 만나버릇해서 미안하기도 했는데, 역시 집에 데려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사촌동생이 오랜만에 집에 놀러온 마냥 편안했다고 할까, 심지어 난 늦잠까지 잤다..

어제 친구들과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흘러갔지만, 중간에 흘러나온 영어-대학원 준비 문제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끊임없이 뒤가 켕기게끔 했다. 삼수하고, 대학가고, 군대 갓 전역한 나는,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해놓은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보다 앞서가고 있는 친구들은 영어를 공부하고 대학원을 준비하고 학교 생활을 마무리해가고 있는데,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었던 걸까. '잘 마무리 지었다' 고 평가했던 나의 자랑스런 군생활(?)을 20대의 공백기로 만들어 버린 순간이었다.

그들보다 한살 어린 (빠른생일) 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저녁부터 취업 관련해서 인터넷 사이트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막막했다.

 

다들 차별화를 위해 스펙을 쌓고 있었다. 그 스펙은 차고 넘쳐서 그들만의 리그를 다시금 평지로 만들고 있었다.

난 편집자가 되고 싶다.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안된다는 것도 잘 알지만, 난 책이 너무 좋다. 심지어 책 읽는 것 보다도 책 자체가 좋다. 하지만 막연함은 낭만이다.

 

현실은 냉정하다.

 

학점 4점대, 나름 잘 관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68학점을 못 넘겨서 교직도 떨어지고 편입도 안되고 전과도 안되고 복수전공도 안된다. 16~17학점씩만 들으면 133학점 채우고 졸업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렇게 뒤통수를 맞았다.

친구들은 토플, 텝스, 쥐알이, 대학원 이야기를 한다. 난 토익부터 해야된다. 군대에서 난 책을 많이 읽었다. 앙골이 물어본다. '저자는?', '분야는?'

 

'글쎄..'

 

난 지식인이 아닌가보다. 고상한 책은 잘 못 알아먹는 얕은 지식이 머리를 뎅~ 하고 울렸다. 되도않는 통속적인 진중문고 몇 권, 대중들이 보는 역사책 몇 권, 그리고 재테크 책-_-..

 

'경제 책은 그래도 몇 권 읽었어'

 

'설마 경제학 콘서트 같은거 읽고 경제 책 읽었다고 하는 건 아니지?'

 

빙고.. 진중문고.. 피터린치의 월가의 영웅, 벤저민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 어려운 책이지만, 주식 책은 경제 책이 아니지. 애독하는 시골의사의 책들, 엄밀히 말하면 재테크 책이겠지. 화폐 마법의 4중주, 너무 읽기 괴롭고 힘들어서 포기했던, 진중문고 답지 않았던 책.

 

나는 지식인이 아니라 편집자 범주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식에 대한 욕심은 있는데 탐구하지는 않는, 그런.

 

그렇게 웃고 떠들고 즐거웠으면서도 지금 이 새벽의 고요함은, 그렇게 짧은 상처 한토막씩을 꺼내게 한다. 비참한 모임이었던 것 마냥. 그렇게 잘 쳐 놀고, 목이 쉬도록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위닝을 하고, 미니스톱에서 같이 컵라면 먹고, 홍래랑 10여년만에 내 방에서 같이 만담을 나누고, 모두 다 즐거운 추억이 되었는데, 지금 이 시간, 왜, 내 짧은 지식이 이렇게 아픈 걸까..

 

나에게도 꿈이 있었는데.

 

싸가지 없고 이기적이었어도 자신감으로 가득찼던 어릴 적의 그 오만한 매력덩어리는 과연 어디로 간걸까.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고, 자신감을 잃은 나도 고개를 숙인 채 막연함을 슬퍼한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영어책을 꺼내봐야 하나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한문을 외워야 하나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취업사이트를 들락날락 해야 하나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학원 문을 두드려야 하나보다.

나도 어쩔 수 없나보다..

 

전역은 역시, 아무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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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ote at 2010/01/18 11:18
준비해야 하는 것은 맞는데, 너무 조급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흐흐... 난 대학 1년 마치고, 21,22,23살에 걸쳐서 다녀와서, 갈 때는 인생 60살면 2년이면 1/30이고 3년이면 1/20이야........
뭐 이정도 쯤이야~ 라고 생각했었고, 끝냈을 때는 이젠 내가 국가에 해줘야 할 것 중에 하나를 끝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이어지는 예비군에 민방위 교육은 쫌! 짜증이 나더군요. (사실 학교에서 5년간 예비군을 해서, 동원은 들어간 적 없음.) 한참 후에는 젊음이 좀 아까웠구. 더 지난 다음에는 우리나라에서 살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하네라고 자조를 했습니다.
한국에서 남자가 살아남으려면, 기본적인 조건이 따라옵니다. 신체건강하고 군역을 필한... 조건이 완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디에나 따라붙는...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닌데..
전역 2주차.
내 경험을 말해주려고 합니다.
난 97년 8월 7일날 전역을 한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맞나? 하여간 8월 초에 하고, 8월 말에 춘천으로 복학을 했습니다. 네~ 학부 9학기 다녔습니다.
전역하자마자, 1학년때, 불질러놨던, FD(Fire Department 아님)를 해치우기 위해서 돌아가야 했던 것이죠.
9학기 다니고, 대학원 다니고, 이러고 보니, 내 20대는 거의 끝물에 다다렀더라구요. 춘천과 김포에서.
참 허망하기도 했죠. 하지만, 나름 연애를 제외한 하고 싶은 것은 나름 했다고 생각하니까 뭐 자조가 되고요.
급하게 생각하고, 급하게 행동을 하면 지나고 나면 뭘 했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공부해야 하는 것은 맞는데, 무엇을 위한 것이냐? 등등등......

복학도 해야 하겠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것이고,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도 있을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휴식을 통한 경험과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저께 본가에 갔다가 강남교보에 갔는데, 한국전쟁 60주년이라 그런지, 그런 책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장진호 전투 관련해서, 예전에 신문에서 읽은 내용 중에 포위된 미 해병대 사령관의 명령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남쪽으로 이동하라. 이것은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진이다.' 후퇴라는 단어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실상 남쪽으로의 이동은 후퇴인데요.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까? 아니면 사기를 높이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을까?
이런게 역사가 되서, 60년이 지나서 우리에게 돌아오는군요.

"The Coldest Winter" 한국제목, 콜디스트 윈터라는 책이 번역되서 나왔더군요.
가격도 만만치 않고, 두께도 만만치 않고. 서평은 그래도 꽤 괜챦아서, 시도를 할까? 생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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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ote at 2010/01/19 02:28
휴가 나왔을때의 사회와 군생활을 마쳐서 돌아온 사회는 참 많이 달랐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실감각을 찾아가고 있는 것도 같지만, 본시 기우가 많고 쓸데없는 생각이 많은 저인지라.. 일단 학교로 돌아가 제자리를 찾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겠죠. 물론 복학 전까지 여러가지 계획을 세우고 할 수 있는 일들은 해나가야겠구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늘 배우고 갑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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